KINO21

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대추리와 포르노 [PP 연재 2]

2007. 3. 15. 11:09  |   포르노프로젝트  |   키노씨

0. 자다가 봉창 ; 웬 대추리?

관련없다. 관련있다.
이 둘 중의 하나인 건 아니고,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뭐. 이건 주관적인 거다. 그리고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건 또한 정도의 문제인 거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 정치적인 상상력에 관한 문제이다.


1. 포르노, 죄의식과 기쁨들.

포르노를 대하는 감수성은 이중적이다.
유교적 도덕 교육이 내면화된 자들에게,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에게 포르노를 향유한다는 것은 죄의식과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건 물론 심각한 죄의식은 대체로 아니다. 그리고 그 죄의식은 점차로 희미해진다. 반복은 감수성을 무디게 한다. 일상이 괴물인 이유는 '반복'에 있다. 그건 '학습'이다. 그 일상은 '놀라움'을 잡아 먹는다. 물론 일상은 그 자체로 기적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그 죄의식이 크면 포르노는 더 유혹적이 된다. 그건 기쁘다, 그건 행복하다. 그건 금기에 대한 도전이면서, 가치에 대한 전복처럼(!)('처럼'이다) 느껴진다. 사춘기 모험으로서의 포르노가 갖는 기쁨과 이미 어른이 된 '중년'의 "연구용"(한 블로거의 비밀방명록 표현을 빌자면 ^^;;)으로서의 포르노가 주는 기쁨은 다르다.

2. 대추리, 죄의식과 핑계들. 

대추리를 대하는 감수성 역시 이중적이다.
국가주의적 폭력에 대한 순응적인 감수성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견고하게 내면화/구조화 되었고,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거치면서 그 내면화된 두꺼운 껍질에 균열이 일어났다. 87년 6월 항쟁은 그 상징이다. 그리고 우리는 양김 시대를 거쳤고, 현재 스코어 우리는 노무현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 혁명은, 개혁에 대한 그 열정과 소망은 그저 '추억'이었을까?
이제 다시 우리는 박정희 시스템으로 회귀하고 있다.
물론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 대추리, 그 기만의 매트릭스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1977
*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273

386(지금은 486으로도 불리는) 세대의 '변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은 집권했고, 그들이 이제 당대를 대표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대추리' 같은 문제가 생긴다. 그건 국가주의의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그게 아무리 행정대집행이라는 '합법'으로 가장해 있더라도 그렇다. 그게 폭력인 이유는 최소한의 절차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만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은 우리 주권 위에 있는 존재고, 노동자는 매맞아 죽는다(포스코 글1. 글2).
그런데도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다.

그 평온한 우리에게 '대추리'와 '포스코'는 불편한 죄의식이다. 그건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래야 우리가 평안하니까. 그래야 노무현 정권에서 사는 우리가 그래도 스스로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 죄의식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
그건 돈이다. 여기에 '돈'이 들러 붙는다. 그 돈을 '표준'으로 타인의 진정성을 자기와 비교한다. "배부른 농민들이 돈 더 받아 처먹으려는 지랄", "귀족노조 너희들 짜증난다". 이런 식이다. 물론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조선일보에서 써준대로(조선일보는 우리시대의 주술사다),  '감'으로 그렇게 가짜 안락과 평온을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다. 전형적인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 그 기만의 시스템.



3. 포르노와 대추리, 그 기만과 죄의식의 함수관계

*
나는 실은 궁금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일견 억지스러워 보이는 이 글은 그저 나의 궁금함에 대한 내 스스로의 대답일 뿐이니, 이 글이 당신에게 어떤 '한 소식' 전하리라는 기대는, 솔직히 나에게는 없다. 어떤 금지와 내면화된 억압, 그걸 극복하거나,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좌절되거나, 평온하게 느껴지는 방식이 나에게는 궁금하다.

*
포르노의 죄의식은 그것을 '극복'했을 때, 그 '금기'를 넘어섰을 때 돌아오는 기쁨이 커지는 죄의식이다. 포르노의 죄의식과 기쁨은 비례한다. 포르노의 '죄의식'은 그것이 자본의 영향력 안에서 교묘하게 증폭되면서, 상업적으로 소비되기 때문에 오히려 '조장'되기까지 하는 죄의식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방식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의식을 속이는 과정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대추리의 죄의식은 이것과 반대다. '극복'하거나, '기만'함으로써 일상의 안락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죄의식이면서, 그래서 그 기쁨은 죄의식을 '속이는' 과정을 통해서 돌아온다. 이것은 위 포르노가 자신의 죄의식을 상업적으로 증폭시키는 그 과정의 은밀함과 비교하면, 적극적인 기만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숭미적 수구세력이다. 더 심각한 건 여기에는 여야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 형님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
다만 포르노와 대추리는 유사한 메카니즘을 갖는다.
그건 욕망과 소망에 대한 기만이면서, 그 활용이면서, 그 기만의 합리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4. 대추리와 포르노, 그 해방과 공존을 위하여

*
포르노를 통해 자본은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 재생산 과정에서 인간의 본능은 왜곡된다.
대추리를 통해 미국은 스스로의 권력을 확대재생산한다.
그 재생산 과정에서 한국의 주권은 왜곡된다.

그 둘은, 하나는 (위선적인) 도덕적 윤리의식을 상징하는 키워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연대) 의식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그런데 그 둘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내 보기엔 그 둘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 그것은 왜곡되어 있으며, 일방적으로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으며,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다.

*
나는 포르노에 대한 일방적인 반대, 그 위선들, 근엄한 척 하는 국가권력에 반대한다. 그와 더불어 '포르노'를 빙자한 온갖 범죄들에도 반대한다. 포르노는 그냥 포르노다.
그리고 대추리를 일방적으로 왜곡하는 조선일보 월드의 위선과 거기에 편승하는 대중심리, 그래서 쉽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그 순응화된 의식들에 반대한다. 대추리는 빨갱이들이 지랄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소박한 농민들이 자기 땅 지키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곳일 뿐이다.


*
물론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대추리와 포르노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인간의 본능들, 그 자연스런 욕망과 소망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거다.

그런데 그 소망이 실현되는 날, 아니 거기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체험하는 것조차, '밑으로부터', '멍청한 대중'이라고 비아냥 받는 우리들이 '시민'이라는 주체로 다시금 자신의 존재조건을 명확하게 정립하지 않는 한 영영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대중vs시민). 우리들은 조정받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좌표를 인식하고, 그 조건들을 조율하는 자로 태어나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래 우리에게 속한 권리를 다시 되찾아 오기 위한 가장 유효한 싸움과 저항 수단(중의 하나)은 블로그다. 블로그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는 낙관적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웹상의 일기에 불과한 것으로 블로그는 무시되기 일쑤다(물론 개인적인 성찰을 위해서 글을 쓰는 일기로서의 블로그의 역할 역시 나는 굉장히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 일기는 '공개되어 있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관계적'이고, 그 나름으로 연대적이다).  그리고 그 블로그를 대하는 '전통 언론'의 관점도 구태의연하다. 안타깝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공산당 선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바뀌지 않았을까?

만국의 블로거들이여 단결하라!



p.s.
이 글은
2006/08/23 02:16 제 한겨레 블로그에 등록했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