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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노골적인 희생양 [PP 연재 3]

2007. 3. 16. 12:53  |   포르노프로젝트  |   키노씨
1. 맹백한 사기극
포 르노는 가시적이고, 공식적인 현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이다. 그 현존 질서의 이면에 현존질서를 '조정'하는 권력이 있다. 그 권력은 자신을 스스로 법, 도덕으로 부른다. 그 권력은 포르노라는 '희생양'을 선택하고, 그 포르노를 '비도덕의 극치'로 비난한다. 그리고 그것에 '금지' 표지를 부착한다. 그 법의 공식적인 입장은 '선량한 도의관념'이라는 모호한 언어적 조작이며, 눈가리고 아웅이다. 그 권력은 판단하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들의 욕망을 대신한다. 그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욕망들을 심판한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욕망은 팽창하고, 그런데 그것이 팽창하면 팽창할수록 우리의 '비공식적인' 욕망에 대한 죄의식은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그 위축이 효과적으로 내면화되면, 공식적인 법, 도덕의 커튼 뒤에 있는 그들은 흐뭇한 미소를 날린다. 그들은 그 욕망을 이용하고, 스스로는 실현하며,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한다. 

명백한 사기극. 
포르노를 둘러싼 이 위선적인 도덕 구조, 혹은 지배구조.

억 압은 '과시적인' 위선을 낳고, 그 위선은 은폐된 욕망을 낳고, 그렇게 해소되지 못한, 그런데 용인될 수 있'었'던 욕망들은 '폭주'해서 타락과 범죄를 낳는다. 그런데, 아니러니하게도 흔히 타락과 범죄를 즐기는 자들은 권력과 친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타인의 욕망에 대해서만 심판한다. 용인될 수 있었던 욕망은, 용인될 수 없는 타락으로 '변질'된다.

범죄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욕망을 범죄적으로 실현하는 메카니즘.
위선과 도덕과 차별적 욕망의 실현.

권력은 한번도 자기의 욕망에 부끄러운 적이 없다. 

개인적인 욕망이든, 사회적인 이상의 실현이든..
그 방식이 투명하고, 합리적이며, 문화의 틀 안에서, 제도의 틀 안에서 서로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인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Rene Magritte


2. 차이에 대한 학습, 그리고 당연화된 차별
그 위선적인 도덕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그 이분법을 쉽게 내면화한다. 포르노 종사자들, 혹은 거기에 호의적인 '그들'은 '저기'에 있고, '우리'는 안전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경멸의 대상이거나, 보호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보호받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민망한 시츄에이숑.  

그들/우리를 구별하는 표준은 과연 무엇인가? 법? 도덕?

그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스스로 내면화된 학습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들은 항상 비천한 직업(포르노 종사자들..그들은 직업인인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포르노 배우 혹은 창녀는 우리들의 순결한 도덕을 증명하는 타자들이고, 그 타자들을 낯설게 하고, 억압할수록 우리들의 고결함은 높아진다.

그러니까, 우리들, 그 안에 있는 어떤 욕망, 자연스러운 꿈틀거림, 그리고 문화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뽀얀 어떤 것들은 그 색을 바꾸고, 그 향기를 바꾼다. 그것은 추악하고, 숨겨져야 하는 어떤 쓰레기로, 어떤 '변태'적인 것으로 '변신'한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그 욕망들이, 그런데 아직 변질되기 전의 그 순수한 욕망 그 자체가 목소리를 낸다.

"놀고 있군".


3. 포르노와 범죄, 그들/우리. 

나는 포르노를 제작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배우들을 '직업'으로 인정한다. 물론 포르노를 빙자한 범죄행위들(그 범죄는 그 나라와 문화마다 상대적이겠지만)에 대해선 단연코 반대한다. 이를테면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어떤 반사회적인 범죄들. 그건 (내가 이 글에서 비범죄화하자는) 포르노가 아니라, '그냥' 범죄다.

그러니까 난 지금/여기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취향에 대한 자유와 그 선택권에 대한 탄압(최근-2006년 8월-에 벌어진 'F사이트' 사건 )에 반대한다. 그들은 '우리'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이 된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법(참조 : 이 사건의 적용법률인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과 소위 형법상의 '음란죄'에서 핵심 구성요건인 "음란한" 이란 문구에 대해선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은  그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그들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향해 내려진 법의 '심판'에 마주한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그들은 마치 순교자처럼 당당하다.
법의 심판 앞에 선 운영자는 그들을 대신한 또 다른 희생양이며, 그들은 우리들의 희생양이다.

황지우는 [나는 너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가장 무서운 병은 아내와 그 짓을 할 때도 머리 속으로는 음란 비디오의 그 白人 여자에게 성기를 박고 있는 참상이다. 하얀 것은 참 더럽다".

'하얀 것'은 포르노인가?
아니면 당신/우리에게 익숙해진 그 억압과 위선인가?
그것도 아니면, 하얀 것으로 상징되는 순결와 고결로 위장한 당신/우리를 조정하는 권력인가?



 

0. 이 글을 위해 다시 읽고, 참조한 문장들 - 김현, [폭력의 구조 ; 르네 지라르 연구] 중에서.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18).

 

순수와 비순수의 구별이 없어지면... 문화의 위기가 생겨난다. 순수와 비순수의 구별 뒤에 숨어 있던 '폭력의 무차별적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 비극에 나오는 살부, 근친상간, 페스트 등은 차이 위기의 상징들이다. ... 위기의 절정에서 그것을 막는 희생물이 선택되는데 그것이 속죄양이다(47, 8).


욕망의 유토피아를 서로 실현하기 위해, 서로의 욕망을 해방시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문화적 위기, 무차별 현상은 가속화된다. ... 해방적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공격하여 없애려는 사항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따름이다. 희생양은 프로이트주의의 아버지, 법 등이며, 마르크스주의의 부르조아, 자본가 들이며, 니체의 노예의 도덕, 타자의 원한 ... 등이다(61).
해방적 이데올로기, 혹은 탈신비화는 금기를 제거하여 사람들을 차별없게 만들어 희생 제의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 것이다(61).
금기가 없어지면, 사회건설적 폭력이 그 긍정적 힘을 잃고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 그런 의미에서 그(르네 지라르)는 반현대주의자이다(62).
(지라르의) 폭력적 담론의 정치학은 기존질서의 유지이며, 그것의 성화이다(앙리 메쇼니크). 앙리 메쇼니크의 지라르 비판은 지라르의 도덕주의, 엄숙주의에 대한 통렬한 항의이다(64, 5).
=> 지라르 이론의 수구성, 기존 현실질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문장들. 지라르 이론의 수구적 정치성이랄까?


박해에 대한 인류학적 텍스트에는 희생자가 속죄양이라는 것을 말 안 하는 '감추는 텍스트'와 그것을 '말하는 텍스트'의 둘이 있다. 신화적 텍스트는 앞의 부류에 속하고, 성서는 뒤의 부류에 속한다(66).


신화는 박해현상을 신비화시켜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야기다(69). ... 집단적 폭력이 지워지고, 개인적 폭력이 그것을 대치... 그 개인적 폭력까지 지워버리려 한다(그리스 로마 신화). ... 이 단계를 너어서면, 집단적 살인의 흔적 지우기, 흔적의 흔적 지우기라는 목표만이 남게된다(69).


복음서의 진정한 독창성은, 완전한 예수의 무죄성을 통해 박해체계의 폭력성을 탈신비화시킨데 있다. 그도 다른 희생자처럼 죽지만, 그는 신비화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으로 희생제의적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된다. 문화가 희생기제 위에 세워져 있다면, 그 기제는 그것의 기능이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기능하는데, 그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되니까, 수난에 의해 예수의 지상왕국은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서구문화는 그 예수의 수난을 왜곡하여 세운 문화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서구문화는, 모든 문화의 허구성을 탈신비화시키는 탈구적 문화이며, 동시에, 그 전언에 기초하여 희생 제의를 만들어낸 구조적, 신비화 문화이다. ... 탈신비화의 기독교는 또한 신비화의 기독교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드는 순간, 기독교는 신화가 되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된다. 기독교 서구 문화가 제국주의적 박해문화일 수 있는 것은 예수 수산을 제의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성서를 제의적으로 읽으면 안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비제의적 텍스트이다(71,2).


욥 자신이 자기의 죄를 수락하고, 그들의 단죄를 받아들인다면, 속죄양의 유죄는 그야말로 만장일치가 될 터인데, 그는 항의한다. 그 항의가 욥을 진짜 속죄양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 요인이며, 욥의 이야기를 신화로 변모시키지 못하게 한 요인이다. ... 그런 의미에서 외디푸스는 성공한 속죄양이며, 욥은 될 뻔한 속죄양이다. 더구나 그는 끝에 다시 신의 축복을 받아 속죄양의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될 뻔한 속죄양이다. 욥에 비할 때, 예수는 완전한 속죄양이다. 예수는 욥이 반밖에 성공 못한 일을 완성한 분이다. 그의 완성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일로 이뤄진다. 예수의 수난을 통해 욥의 불평은 있는 그대로 이해될 수 있께 된다. ... 욥의 불평을 이해하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난다. 예수가 그 때 나타난다. ... "그가 폭력과 성스러운 것의 논리를 벗어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예고한다". 욥은 옛사람들이 꾸준히 걸어가던 속죄양 만들기, 집단 살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탄식은 오늘에도 여기저기서, 특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모든 나라에서 울려나온다(73 ~ 75).


동물적일 만큼 잔인하고 한이 없는 모방 욕망은 그것의 흉포함을 종교라는 탈 속에 감추고 있다. 지라르의 가설은,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와 마르크스적 비판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인류학에 종교의 중요성을 되돌려주는, 사회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뒤르켕의 이론이나 [토템과 터부]의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다(101).


예술 작품은 초석적 폭력의 자의성과 첫 희생물의 우연적 선택의 회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을 보면서, 개인은 폭력을 회상하고 불만을 정화한다(102).



<참조문헌>
김현, [폭력의 구조 ; 르네 지라르 연구] (김현전집 10), 문학과 지성, 1992.




p.s.
이 글은   http://wnetwork.hani.co.kr/skymap21/3508 에 썼던 글을 지우고, 추고해서 다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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