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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 [시민케인]이 위대한 이유

2007. 3. 25. 09:27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제 독창적인 견해나 해석이 별로 없는 글입니다. 그냥 들은 걸 옮기는 수준에 불과해요. 주로 정성일씨가 [FM영화음악]에서 들려줬던 이야기들입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풀어봅니다. 그 기억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기억의 오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본다면, 그 기억의 변형(스키마)이 제 해석이라면 해석이 될 수 있겠네요. 다만 '정보'의 차원에서는 대체로 확인한 사실, 해석(다수설로서)이기 때문에 크게 틀리진 않을 겁니다. 이 글은 짧은 글입니다. :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미국. 추리극. 119 분.  

오손 웰즈 Orson Welles

오슨 웰즈 Orson Welles :  찰스 포스터 케인 역
도로시 코민고어 Dorothy Comingore :  수잔 알렉산더 케인 역
조셉 코튼 Joseph Cotten :  제드디아 르랜드 역
아그네스 무어헤드 Agnes Moorehead :  메리 케인 역
루스 워릭 Ruth Warrick :  에밀리 몬로 노튼 케인 역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 [시민케인]이 위대한 이유 ; 영화와 테크닉





 

0. [시민케인]에 대한 말말말.

"시민케인 이전에 시민케인 없고, 시민케인 이후에 시민케인 없다".
"시민케인의 미장센은 민주주의적인 미장센이다". - 앙드레 바쟁
"영화는 시민케인 이전의 영화와 시민케인 이후의 영화로 나뉜다".
"나도 시민케인 좋아한다" - 성룡 ^ ^


 

1. [시민케인] 재밌나요?


제가 보기엔 그다지 재미없습니다. ^ ^;


[시민케인]은 솔직히 굉장히 재밌거나, 눈이 동그래지는 스펙터클이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물론 굉장히 촘촘하게 짜여진 스토리라든지, 추리소설적인 기법들은 약간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시민케인]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아요.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시민케인] 이후의 영화이 [시민케인]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1941년작이라는 걸 생각해보십시오.



2. 롱 테이크(long take)와 딥 포커스(deep focus)


시민케인이 위대한 이유는 롱 테이크와 딥 포커스 때문입니다.
특히 '딥 포커스' 때문이죠.


존재의 제1조건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시간과 공간'이겠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영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는 다릅니다.
영화 속 시간은 유동적이죠.
단선적인 흐름을 쫓지 않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끊기기도 하고, 과거로 회귀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현실로 돌아오고, 또 미래를 향해 질주하기도 합니다. 다 좋습니다.


다만 '사유의 시간'을 생각해봅시다.
영화는 보통 2시간 안팎의 물리적인 시간을 갖습니다.
그 속에서 표현되는 시간은 수억년일 수도 있고([지구를 지켜라]처럼요 ^ ^;), 현실의 물리적인 시간과 거의 일치할 수도([24]처럼요 ^ ^; ) 있습니다.


다만 잦은 편집, 샷의 분할은 사유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끊어놓을 확률이 높습니다.
시간은 인위적으로 단절되고, 공간 역시 분할되며, 이미지는 이어지지 않고 폭주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이미지들과 충돌합니다. 극단적인 롱 테이크로 유명한 테오 앙겔로플로스는 이런 인위적인 '단절'을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저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민케인]에서 롱 테이크는 유년시절을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사용됩니다.
롱 테이크라는 영화적 테크닉을 영화 속 이야기와 '함께' 사유하는 것이죠.
주인공에게 유년은 온전하게 모든 시간이 되돌아가는 '그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영원히 끊기지 않을 것 같은 영원성에 대한 향수와 세상을 모두 어어주는 완전성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롱 테이크로 촬영한 것이죠.



이제 공간이 남습니다.
영화는 피사체를 '평등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A, B, C, D라는 서로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철학, 서로 다른 세계관, 영화속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 공간 안에 그들이 모두 있을 때, A에 포커스를 맞추면 다른 B, C, D는 희미하게 지워집니다. 나머지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딥 포커스'라는 테크닉의 철학은 민주주의적인 '선택'을 관객에게 돌려주는 시도입니다.
오손 웰즈의 말처럼 "내가 선택하지 않고, 관객이 선택하기를 바란"것이죠.
이제 관객들은 그저 감독의 선택에 의해 '조정'되는 피동적인 객체에서 벗어나, 영화 속 갈등하는 철학들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문학평론에 있어 '수용미학(독자반응비평)을 주창한 볼프강 이저, 한터 야우스의 시각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롤랑 바르트 역시 이와 유사한 취지라고 저는 평범하게 해석합니다).


물론 이는 딥 포커스라는 테크닉을 구현한 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선택권'은 아닙니다만, 그 테크닉이 구현하는, 지향하는, 거기에 내포된 철학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대한 영화평론가인 앙드레 바쟁은 "민주주의적인 미장센"이라고 불렀습니다. 



3. 영화와 테크닉


영화의 철학, 영화의 비전은 영화적 테크닉과 불가분
입니다.
그저 이쁜 장면, 눈이 황홀한 시각적 쾌감은 영화라는 '구경거리'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되겠지만, 영화라는 '예술'(영화는 당연히 예술이죠. ^ ^; 그래서 구태여 '예술 영화'라는 조어를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되기 힘듭니다. 


그것이 브라이언 드 팔마(마틴 스콜세지와 비교해서)나 에드리안 라인(저로선 리들리 스콧과 비교하고 싶군요)과 같은 같은 놀라운 테크니션들이 '장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거장'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상입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서 좀 지루하지 않았나 염려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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