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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금자씨 - [친절한 금자씨] 단상

2007. 4. 4. 10:42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예전에 썼던 글(정치적 상상력으로서의 영화)을 좀 많이 추고한 글입니다. 스포일러는 (거의 혹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볼만한 분들은 이미 보셨겠지만요. 이 글을 읽고 한분이라도 다시 봐야지 싶은 독자가 계시길 기대하고 씁니다.


0.
이 글은 당신이 친절한 금자씨를 좀더 설레는 기대를 갖고 만나기를 바라는 주책맞은 중매쟁이가, 금자를 대신해, 당신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일 뿐이다. 그 중매쟁이는 물론 과도한 '허풍'으로 당신을 현혹할지도 모른다. 그 허풍에 당신은 냉소를 보낼 수도 있고, 혹은 혹할 수도 있을테다. 물론 나는 후자이길 바란다.

영화는 거듭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영화는 그저 싸구려 구경거리가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개새끼는 꼭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멘~!

친절한 금자씨 (Sympathy For Lady Vengeance, 박찬욱. 2005)
한국. 정치 드라마. 112 분. 2005.07.29
이영애(금자)  최민식(백 선생)
 
권예영(제니) 김시후(근식) 남일우(최 반장)
김병옥(전도사) 오달수(장씨)
이승신(박이정) 김부선(우소영) 라미란(오수희)

 


1.
친절한 금자씨(이하 '친금')은 풍부한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중층적이다. 거기에는 몇 겹의 메타포가 겹쳐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적어도 나에게, 그렇게 느껴진 메타포의 메시지는 '노예의 철학'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이다.


2. 니체와 금자씨

'친금'의 세계관은 [도덕의 계보학](니체)에서 차용한 것이 분명한 그 세계관이다.
니체는 '복수심의 방향 바꾸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복수가 성취되려는 순간, 사제적 권력이 개입한다.
그 사제는 용서와 화해를 노래하고, 설득한다. 그래서 복수의 방향을 바꾸고, 결국 우리의 복수는 실패하고 만다. 그 실패는 우리가 노예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복수는 적극적인 복수로만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가 되지 못한 에너지는 우리 안에 패배와 좌절과 고통을 내면화시킨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용서'와 '화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다.

니체는 예수와 투쟁했다.
그리고 니체가 어쨌든간에, 우리는 예수가 아니다.

우리는 엉터리 화해와 용서의 감옥에서 다시 복수를 꿈꾸는 노예가 된다.
왜냐하면 복수는 복수를 통해서만 불태워질 수 있으니까.

'친금'은, 이전의 상투적인 도덕교과서형 영화들의 비전과는 다른 방식에서, 니체의 교훈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걸 정치적으로 실천한다.

그 순결하고, 비타협적인 복수.
우리 가슴에 시퍼런 비수를 꽂은 어떤 씨발놈이 있다.
그 개새끼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신의 얼굴을 한 용서인가, 아니면 우리의 가슴에 박힌 그 비수인가.

금자씨는 아직 우리 가슴속에 박혀 있는 그 비수를 뽑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짜 타협의 세계를 만들고, 그래서 우리에게 화해와 희생과 용서라는 신성한 의무를 부여하는 가짜 사제에게 금자는 말한다.

"너나 잘 하세요".


3. 두 개의 영역
'친금'에는 복수와 용서에 대한 두 개의 영역이 등장한다.
하나는 용서해야 하는 복수고, 다른 하나는 복수해야 하는 용서다.
말장난이라고?
아니.

하나는 용서함으로써 복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수해야만 하는 용서다.
그건 정말이다.

그러니 풀어서 말하면, 사랑은 용서함으로써 복수한다.
하지만 증오는 복수해야만 그것이 용서가 된다.

전자는 숙명이라면, 후자는 운명이다.
전자가 불가피하다면, 후자는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영역이다.
전자가 사적인 영역이라면, 후자는 공적인 영역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후자는 정치의 영역이며, '정의'의 영역이다.


4. 일상으로의 회귀
이 테마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형상화된 바 있다.

'친금'에서 비정하리 만큼 냉정하게 실천한 그 순결한 복수는 그렇지만, 일상이라는 더 커다란 매트릭스, 그 거대한 덧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일상이라는 괴물은 가짜 사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교활함으로 우리에게 내면화되었고, 죽음의 기억도 그 작동을 멈추지는 못한다. 그 일상은 우리의 삶을 연명케 하는 숙주처럼, 그래서 그것과 분리되는 순간 우리의 삶이 멈출 것처럼 우리의 몸뚱이에 붙어 있다.

아무리 아픈 기억도 아무리 슬픈 상처도 일상이라는 시스템의 회로에 갖혀 버린 우리를 떼어내지는 못한다.

그건 참 슬프다.
그건 참 쓸쓸하다.
그건 참 쓸쓸하고, 슬프며, 엿같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복수가 무의미한 건 아닐테다.
아직 일상은 견고하지만, 그 일상에 균열을 내는 추억을 우리는 만들었으니까.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영화적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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