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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길을 잃다 : [박쥐] 프리뷰

2009. 5. 5. 09:28  |   프리뷰  |   키노씨
* 스포일러 (전혀, 아주 예민한 독자라면, 거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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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그로테스크한 블랙유머...



0. 흥행 : 롱런은 힘들겠다
나 는 박찬욱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누구처럼 '박찬욱의 걸작, 아찔하다'라는 환호 가득한 제목을 나 역시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염려다. 이후의 박찬욱 영화는 제작사로부터 꽤나 압박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그런 불길한 예감. 전작인 [사이버그지만 괜찮아]가 관객들과의 교감에서 실패했다면, 이번 [박쥐]도 느낌이 안좋다. 쉽게 말해서 재미없다(그렇다고 흥미롭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박찬욱과 송강호라는 이름값 때문에 초반에야 관객이 들겠지만(글 쓴 뒤에 살펴봤더니 올해 개봉작들 중 최단 기간 100만 돌파란다), 최소한 '입소문'으로 롱런하기는 매우 어렵겠다.

" 머리 나쁜 아이들은 입 좀 다물지?"  이렇게 스스로 바보선언하는 촌평들이 노이즈 마케팅에 일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글쎄.. 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슨 자연주의니 라캉이니 지젝이니 운운하는 '마루타비평'(아래 4. 참조)이 도움을 줄까? 글쎄, 이것도 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흥행은 개봉 둘째 주부터는 좀 급격하게 고전하지 않을까 싶다.

[박쥐]에 관한 말말말들은 풍성하겠지만, 그 거품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마더]가 얼마나 해줄수 있을지가 개인적으론 관심사다. 사족이지만, [마더]는 그냥 [마더]가 아니라 [마더 by 봉준호]다. 그러니 기상천외한 '봉준호 마케팅'을 하고 있는데... 왜 박쥐에선 'by 박찬욱'이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박찬욱이라는 이름값은 수식할 필요도 없을만큼 넘버 원인건가? 농담이지만, 이런 촌스런 마케팅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갖는다. 'by 봉준호'라뉘.... 봉준호도 참 민망뻘줌하겠다.

1. 박찬욱 필모그래피 내부에서의 비교 고찰 : [복수는 나의 것]의 부조리극 버전
일단 [달은 해가 꾸는 꿈]이나 [삼인조], 그리고 [사이버그...]는 제껴놓고.
[박쥐]는 [복수의 나의 것]처럼 파격적인 블랙유머나 창조적인 그로테스크 이미지, 의미심장한 엔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절한 금자씨]처럼 과감하면서도 성찰적인 정치적인 비전이 느껴지지도 않으며, [올드보이]처럼 액션의 쾌감이나 내러티브의 입체적인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블랙유머라는 점에서는 매너리즘이 느껴지고, 그로테스트한 이미지들은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함의를 추출하기에도 뭔가 삐리리 하다.

소위 '복수 3부작'은 박찬욱 영화의 기본 코드인 정치적이며 성적인 결핍으로서의 욕망, 그로테스크한 인공적 이미지, 연극적이고 과장된 인물 등을 공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박찬욱 영화는 '시대와의 불화'(이문열을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고...;;)라는 심리적 배경을 갖는데, [박쥐]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 시대는 뭔가 잘못됐다'라는 근원적인 불안과 그 불안을 전복시키려는 저항의 이미지, 그 불안과 저항이 세속적인 욕망의 차원에서 서로 엉키고, 다시 풀어지는 그 놀라운 변증법적 모순과 극복의 이미지 말이다. 하지만 [박쥐]는 뭔가 좀 엉성한 느낌이랄까, 덜 조율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기존작들 가운데 가장 닮은 건 [복수의 나의 것]이다. 다만 [박쥐]는 훨씬 더 연극적이고, 평면적이다. 공간적인 배치도 그렇고, 인물들의 상징성도 그렇다. 내러티브의 논리적 인과로 보자면, 이건 스토리가 말이 되나 안되나의 피상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 완결성(설득력)에서 [복수는 나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흥미로운 건 [쓰리](옴니버스 영화. 박찬욱이 연출한 '흡혈귀'에 관한 에피소드)와의 유사성이다. 전혀 다른 감수성이지만, 차라리 [박쥐]가 [쓰리]의 확장 버전이었다면 훨씬 더 볼만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좀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밀어 붙이거나, 혹은 연극적인 인물들의 속성들을 좀더 자연스러운 인과를 갖고 배치했어야 했다. [박쥐]는 아무리 우호적으로 봐도 어중간하다. 이건 무슨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를 이야기해야 하는 국면이 전혀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양반들은 물론 있다). 무엇이든 좀더 확실하게 선택했어야 했다. [박쥐]는 너무 엉성하게 작위적라서 인물들 간의 유기적인 연계와 속성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심지어는 김옥빈이라는 인물은 그 인물 내부에서조차 그 성격이 따로 논다. 이건 인물의 입체성이니, 내러티브 진행상 자연스런 인물의 성격 변화니 이런 것과 상관없이 인물 형상화에 실패했다는 의미다. 언젠가 박광수가 [베를린 리포트]를 찍었을 때 들어야 했던 '기계적인 작위성'이라는 비판에서  박찬욱도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베를린 리포트]처럼 엉망으로 작위적이진 않다. 송강호는 여전히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는 캐릭터이긴 하다. 다만 아무리 박찬욱이라고 해도, 송강호나 김혜숙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닌 건 아니거다.

2. 그로테스크와 블랙유머 사이,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길을 잃다.
우 리 시대의 음란함과 탐욕에 대한 역설적인 교훈극이라고 [박쥐]를 해석한다면 가장 상식적인 해석일 것 같다. 그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이미지들은 박정희시대 삘나는 한복집의 기괴한 이미지들과 겹치면서 더더욱 음산한 느낌으로 살아난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은 더 나가지 않는다. 그냥 과거회귀적이고, 그냥 기괴하다. 그저 쉽게 해석가능한 수준에서 인간의 본능과 종교적 성스러움의 대비, 자기 희생과 파괴적 욕구의 대비, 일상성으로서의 속물코드와 그 일상성을 뛰어넘는 박찬욱 영화의 시각적 테마의 변주로서 크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반복. 이게 다다.

하지만 박찬욱 영화에서 기대하는 건 이런 뻔한 차원에서의 식상하게 짜맞춰진 교훈극이나 평면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이 아니다. 이율배반과 속물근성, 그리고 결코 딴 몸이었던 적 없는 정치적인(권력적인) 욕망과 성적 욕망의 이미지, 그 겹침과 엇갈림은 내가 박찬욱 영화를 특별하게 평가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박쥐]에서도 그런 시도들은 물론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걸 형상화하는 박찬욱의 의도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내심 영화를 보는 동안 가령 '장자연 사건'들 따위를 [박쥐]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박쥐]는 그럴만한 상상력의 여지를 관객에게 마련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미지의 이미지들이 연속적인 이어짐으로 설계되는 일종의 커다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전략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주된 속성과 종된 속성의 계산된 조율, 비유자하면 일종의 주조색 설정이 필요하다. 비극이 주된 색인지, 아니면 희극이 주된 색인지, 그 양자는 어떤 거시적인 테마 속에서 서로 거시적인 디자인 위에 배치될 것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박쥐]는 이게 뒤죽박죽이다. 서로 단절적인 평면으로 이어진 이질적인 모자이크 같다. 이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양 요소가 완벽한 수준에서 서로 불가분의 요소로 호흡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그래서 내적 내러티브의 설득력이 거의 바닥 수준으로 내려가 있다. 이런 내적 내러티브, 이미지 그 아래에서 호흡하는 내적 설득력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성취된 영화는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면 [복수는 나의 것] 혹은 [친절한 금자씨]다. 결정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서 박찬욱은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염려마저 자아낸다. 비극인가 희극인가? 아니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그 양자가 완벽하게 서로에게 속한 희비극인가? [박쥐]는 모호한 지점에서 멈춰서고 있다.


3. 연기 : 썩 훌륭하다.
특히 송강호와 김혜숙은 대단히 훌륭하다. 다만 김혜숙의 이미지는 필요 이상으로 그로테스크하고, 김옥빈은 열심히 연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함량 미달을 자인하고 있으며, 송영창의 등장은 의도적이면서 가장 의미심장하기는 하지만 너무 비중이 약하다. 신하균과 오달수는 거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이전 이미지들의 변주라는 성격이 강해서(물론 신하균이 훨씬 망가지는 이미지로 헌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않는다.  

[박쥐] 에너지는 절반 이상은 송강호에 의존하고 있는데, 송강호는 역시나 막강 연기력을 뿜어낸다. 송강호의 연기'만' 감상하기 위해 극장에 찾겠다는 관객들이 절대 다수라면 이 영화는 강추다.  하지만 송강호의 연기'도' 보기를 원하는 관객들이 상식적이라면, 박찬욱은 뭔가 좀더 대답을 들려줬어야 한다. 여기에는 그게 없다. 있어도 좀 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가 지적한 "개인취향의 수집품"이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지만, 이런 거대 배급망을 갖는 영화를 '개인취향의 수집품'으로 한정짓는다는 건 한국영화의 풍토에서는 대단한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4. 어떤 문화평론가의 스포일러 만발한 계몽 리뷰에 대해 
어 떤 텍스트도, 그것이 회화이든, 조각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영화이든 간에, 대부분 언어를 통해서 해석되곤 한다.(물론 모든 예술작품들은 서로 상호간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모든 예술적 표현형식도 공히 '언어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각설하고, 영화를 해석함에 있어서 표피적인 내러티브, 쉽게 말해 줄거리를 문자적(문학적,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문자중심적 태도를 프랑소와 트뤼포는 가장 저주했다. 나는 여기에 기꺼이 공감한다. 영화는 '문학'이 아니다. 이것은 자명한 것이다. 사족으로, 경계해야 하는 트뤼포의 태도도 있는데, 트뤼포는 '가장 후진 감독의 걸작보다는 대가의 졸작이 위대하다'는 식으로 반응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방적인 '박찬욱에게 경배를~!'도 좀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하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요즘 유행하는 서구의 지적 사조'를 영화에 갖다대는 (정말 지긋지긋한) '강단식 비평'에 대해선 영화와 같은 대중적인 예술 형식이 어떤 비평을 요구받고 있는지를 심각한 수준에서 고민하게 한다. 즉, 이런 관객들, 혹은 독자들의 반발은 저널리즘 비평과 소위 '강단식 비평'의 위기를 반영한다. 영화를 통해서 철학을 논하지 못할 이유는 없고, 오히려 영화를 통해서 문학과 철학을 논할 수 있어야 하지만, "필자의 지젝과 정신분석학 학습을 위한 마루타로 영화를 갖다 대주고 있"다고 독자들이 느낀다면 그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프레시안의 박쥐 영화평은 아마도 '포털'에도 송고되어 메인에 노출되었거나, 해당 포털의 하위 영화 서비스 페이지에 링크된 것 같다. '식인토끼'의 영화촌평이 인상적이다. : )
*   명수(210.***.59.62)  | 2009/04/28 14:01:45
영화 개봉된 지 한참 지났으면 모를까 상당수 사람들이 영화를 못본 상태에서 이런 영화평을 올리는 의도는 뭔가요. 포털 영화평이 본인 일기장 속 감상문인가요.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과도한 줄거리 노출. 심히 거북하네요.

* ssip(218.***227.236) | 2009/04/28 13:37:57
이런 영화평 이제 지겹고, 짜증이 나고, 읽으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영화 자체에 대한 진지한 비평보다, 필자의 지젝과 정신분석학 학습을 위한 마루타로 영화를 갖다 대주고 있는게 아닌지...

* 열심자(164.***.115.157) | 2009/04/28 09:56:55
이 평론이 나쁜 이유: 첫째, 스포일러가 아무런 경고없이 불쑥 튀어나온다. 반전 없는 영화라면 결론을 미리 말해버려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둘째, 일반인이 읽기에 너무 어렵다. 경제전문가 아닌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경제평론가가 자본의 한계대체율 체감이 어쩌고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면, 그게 제대로 된 평론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신문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지젝이 무슨 말을 한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른다. 대중이 읽기에 조중동보다 더 쉽게 쓰지 않으면 절대 조중동을 넘지 못 한다.

* 식인토끼(119.***.88.156) | 2009/04/28 09:41:58

* Gazer(59.1***15.105) | 2009/04/28 09:38:29
우와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라캉과 스포일러를 만났다.

- 팜므파탈을 이기지 못한 뱀파이어, <박쥐> (기사입력 2009-04-27) 의 독자평 중에서


위 영화평에서 송강호와 김옥빈이 '공중 널뛰기(?)'하는 장면에서 극중 김옥빈이 느꼈을 일탈적 쾌감을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선 크게 공감하고,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인상적인 장면들은 종종 만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작품 속에 스며들지는 못한다.

더불어 (개인적으론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중적인 친화도라는 차원에서는 평가하는 리뷰어인) 이 동진이 왜 걸작이라고 이야기하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리뷰든, 프리뷰든 절대 피하는 입장이라서 제목만 봤는데, 이동진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이동진 리뷰는 이 글 쓴 뒤에 좀 확인해 봐야겠다.  왜 걸작이라고 생각하는건지 궁금하다(리뷰 제목이 '박찬욱의 걸작, 아찔하다'임). (이 글을 모두 다 쓴 뒤에 이동진의 리뷰를 읽었다. 읽고보니) 내가 왜 이동진을 별로 안좋아하는지 알겠다. 아찔하게 맹탕이다. 농담이고, 내가 부정적으로 해석한 요소들을 거의 모두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이창동을 떠올린 부분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뱀파이어 영화의 관습에 대한 전복이라는 부분에 대해선, 그냥 웃었다. 멀리 갈 것 없이 [렛미인 Let me in. 원제 : Låt den rätte komma in. Let the right one in(2008. 스웨덴)]이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렛미인]은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넘어선다는 그 창조적 파괴라는 측면에 한정한다면  [박쥐]보다는 뛰어나다.  

5. 기타
ㄱ. 원작 :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켕(Therese Raquin)
엔 드 크레딧을 볼까말까 하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지켜봤는데, 원작이 에밀 졸라의 '뭐시기'(계속해서 자리에서 뜨는 관객들이 화면을 가리는 통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라고 써있다. 지금 찾아보니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켕(Therese Raquin)'. '테레즈 랑켕'은 소설 속 여자 주인공 이름이라고 한다. 자연주의 소설로 문학사에서는 분류. 박찬욱이 10여년 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모티브가 되었다고.(참조글)

ㄴ. 스포일러에 대한 불안
점 점 더 영화평에 대한 스포일러의 불안은 가속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특히나 개봉 초기 영화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 해당 영화에 대한 어떤 평도 접하지 않는 편이다. 영화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 기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기 직전 우연히 RSS 리더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몹시 좋아하는 한 블로거벗의 [박쥐] 관련글을 읽었다. 아뿔사!.첫 줄에 결정적인 스포일러(영화 볼 독자들은 알아서 클릭하기)가 있었다. ㅡ.ㅡ;;; 그 결론을 미리 알고 봐서 영화에 대한 감흥이 상당히 추락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들지만, 다행스럽게도(?) 결론을 몰랐다고 해도 감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는 매우 유쾌하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위 프레시안 기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동진의 해당 리뷰에서도 스포일러에 대한 안내는 부실한 편이다. 나처럼 스포일러에 예민한 독자들이 읽으면 짜증이 날 법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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