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21

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아픈게 항상 나쁘지는 않다 - [가족의 탄생]

2007. 2. 14. 09:08  |   프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프리뷰 성격의 그냥 단상입니다.
스포일러의 불안은 고려하지 않지만, 스포일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족의 탄생 (Family Ties, 2006) 
한국. 113 분. 개봉 2006.05.18
김태





아픈게 항상 나쁘지는 않다.




 

 
말은 그 처음의 말도 그 최후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의미는 언젠가 찬란한 귀향의 축제를 맞을 것이다.
- 미하일 바흐친









 


내가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건 내 동생이다.
난 문득 문득 이런 낭만적인 가정을 하곤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고통을 함께 한.. 내 동생, 혹은 내 누이..


그리고...
우리가 나눈 건 피가 아니라, 고통과 결핍이다.

그건 우리만 나눈 거다.
딴사람은 여기 끼어들 수 없는 그런거..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식과 위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에게는 그렇다.


가족..
발음되지 않는 외국어처럼 낯설고..
찢어진 행주처럼.. 또, 식상하다.  


여기 어떤 이야기가 있다.
그건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 아픈 이야기가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인지.. 당신은 모를거다.

그건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런 이야기다.  


고통은 항상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그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좀더 예민하게 하고, 더 간절하게 소망하게 한다.


세상이 항상 불공평하진 않다.  
때론 그림자가 선물이기도 하니까...
고통은 기쁨을 낳는 천사이기도 하니까.
그 고통의 뿌리 속에 천사가 웅크리고 앉아서 날고 싶어하는 그런거...  


난 지금 누군가가 참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데..
그건 물론 내 동생과 나의 누이와 엄마겠지만..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다.


그 사람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데..
왜냐면 그 사람은 나에게 부끄럽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 사람 마음이 내 마음에 닿는 걸 느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 마음을 그 사람이 마음대로 사용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잠시 침묵하고,
잠시 기도하련다..






#. 별점
* 총평점 : ★★★★★

* 영화적 비전 : ★★★★★
* 대중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p.s.
이 영화 놓치셨다면, 꼭 보십시오
여기에 세상의 모든 진실이 있진 않지만
어떤 간절하고, 따뜻한 진실이 있습니다



  |  

미스터리 Mrs. 로빈슨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본 영화 [졸업]

2007. 2. 13. 21:29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짧은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 (꽤 많이) 있습니다.


1. 벤자민의 모험-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통과하기

[졸업]은 중층적 텍스트다. 그것은 한편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이면서,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제의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졸업]은 무엇보다도 욕망에 관한 기묘한 역학을 드러내고 있는 훌륭한 심리학 텍스트다. 그 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 [졸업]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심리적인 역학관계이다.


그 역학관계의 중심에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벤자민이 있다. 벤자민에게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 모험은 Mrs. 로빈슨(앤 밴 크로프트)과 그녀의 딸 일레인과의 모험이다. 그 모험은, 프로이트가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처럼, 벤자민이 어른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난관이다. 여기서 외디푸스 콤플렉스 구조의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벤자민-Mrs. 로빈슨-일레인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벤자민의 탄생-퇴행-성장이라는 공식과 겹친다. 또한 그 공식은 대학-사회진출 前-사회진출 後, 아이-사춘기-어른의 공식에 다름 아니다.

 

마이크 니콜슨의 [졸업]은 공항에서 막 귀향하는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의 얼굴 클로즈-업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막 공항을 통과하려는 벤자민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지고, 벤자민의 낯선 듯 불안한 얼굴 저 편에서 공항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그 안내방송의 목소리는 '금지'를 드러낸다.


“……하지 마시오” 라고 거듭 말하는 목소리는 근엄하다. 그리고 마치 엄마의 자궁에서 막 나온 듯 한 불안에 가득한 벤의 얼굴이 그 목소리와 겹쳐진다. 이것은 마치 영화 전체 이야기에 대한 복선인 것처럼 보인다. [졸업]은, 그 시작에서 이미, 지금부터 당신들이 보아야 할 이야기는 금지와 불안과 그것에 대한 통과제의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벤자민의 생일날. 벤자민은 엉뚱하게도 잠수복을 입고 등장한다. 벤자민은 문 밖으로 나서기를 망설인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재촉한다. 재촉이 다급해질수록 벤자민은 자신의 잠수복을 내던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잠수복'은 아버지의 기대와 벤자민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과 벤자민이 사회에 적응하려면 입어야하는 사회의 틀을 상징한다. 그리고 벤자민은 수영장 속으로 빠진다.


벤자민이 자신의 몸을 빠뜨리는 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의 始原과 母性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런 이미지의 겹침이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벤자민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올라올 수 없게 하는 장면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억압적인 규칙과 그 틀을 상징한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이미지와 겹치면서, 그 반대편에 선 낯설고, 두려운 사회라는 이율배반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 안에서 벤자민은 망설인다. 벤자민은 대학에서 학교신문사 편집장을 거친 전도유망한 졸업생이며, 많은 기대의 시선들에 갇혀 있는 가엾은 ‘소년’이다. 그 기대의 시선이 드러내는 억압, 그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가부장사회의 질서이다.


영화 속에서 그 아버지의 모습은 다양한 환유를 통해 드러난다. 그 주류적인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상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교회 ‘액션’(교회에서 일레인을 구출해내는 벤자민의 ‘혈투’는 하나의 스펙터클이라고 할 만하다)장면이다. 이 장면들에서 벤자민은 교회라는 상징적인 공간에서, 십자가라는 ‘劍’을 통해 그들을 무찔러낸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자물쇠 삼아 그들을 교회 속에 가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험이 끝나고 자신을 기다리는 ‘백마’(버스)에 올라타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이 된다. 그것은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다름 아니다.


그는 기성세대를 가둔 그 십자가가 결국은 자신을 가둘 것이 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며, 그리고 그 자신, 어른이 되어야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가부장제의 시작이며, 그것의 토대이다. [졸업]이 낭만적인 이야기이면서, [졸업]의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을 예정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졸업]의 마지막 장면, 버스 뒷 자석에 앉은 벤자민의 얼굴 클로즈-업 장면은 도저히 악당들로부터 사랑을 쟁취한 기사의 표정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낯설음과 불안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졸업]의 첫 장면과 겹쳐지면서, 영화는 벤자민의 불안에 가득한 표정으로 그 시작과 끝이 갇혀있는 구조가 된다.





졸업 (The Graduate, 1967)
미국. 105 분. 우리나라 개봉 1988.11.19
마이크 니콜스
 (Mike Nichols. 1931년 독일 베를린 출생)



2. 미스터리 Mrs. 로빈슨

마지막으로 살펴야 하는 것은 ‘미스터리’ Mrs. 로빈슨이다. Mrs. 로빈슨은 어떤 의미인가.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삼각형 구조, ‘자아-아버지의 권위-어머니로 향한 욕망’의 구조에서 그녀는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Mrs. 로빈슨은 벤자민의 욕망의 구조에서 어머니이면서, 아버지인 것이다. 그녀는 벤자민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벤자민을 선택하기도 한다.


Mrs. 로빈슨이 벤자민을 욕망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그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소년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Mrs. 로빈슨는 말한다. “여자 경험이 없지?”. 이 말에 벤자민은 발끈하고, 어른의 세상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 ‘유발된’ 욕망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더 커다란 모험이 벤자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의 욕망은 Mrs. 로빈슨에서 그녀의 딸인 일레인으로 전이(轉移)한다. 그것이 단순한 이전(移轉)이 아니라 전이(轉移)인 것은 욕망의 대상이 바뀌면서, 그 욕망의 성질 또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以前의 욕망은 기성사회의 억압이라는 생산물을 만들고, 새롭게 전이한 욕망은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의 욕망이 된다. 즉 욕망이 전이하면서, 욕망의 전이를 전후한 욕망은 서로에게 대립하는 욕망이 된다. 前者는 기성세대의 질서라는 생산물을 만들어 벤자민을 금지하고, 억압하는 상징이 되고, 後者는 그것을 깨뜨리려는 저항의 욕망이 된다.


영화 속에서 Mrs. 로빈슨은 일레인에게 나아가는 벤자민의 욕망을 방해하고, 금지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삼각형 구조에서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녀는 금지된 욕망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이 충족되면서, 이제는 아버지의 이름이 되어 벤자민에게 금지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벤자민의 욕망을 일으키지만, 벤자민은 그 욕망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욕망의 전이는 그녀를 벤자민의 적으로 만든다. 그녀는 무찔러야 하는 기성세대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제 벤자민은 더 이상 Mrs. 로빈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단 성취된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벤자민에게 Mrs. 로빈슨는 통과제의의 메타포가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미묘한 이끌림의 정체는 기성사회의 억압이라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Mrs. 로빈슨는 이율배반 그 자체가 된다. 그렇지만, 과연 일레인은 벤자민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일까.


3. 결어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간다. 일레인과 벤자민의 얼굴이 서로 번갈아 가며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들의 표정은 불안과 기대의 낯선 경계에 있다. 벤자민은 애써 웃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억지스런 미소는 불안을 더욱 증폭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결국 우리는 벤자민과 똑같은 표정이 되어 불안하게 벤자민과 일레인을 바라본다. 그들이 결국 또 다른 Mr. 로빈슨과 Mrs. 로빈슨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을 애써 지우며..





#. 재미삼아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영화적 비전 : ★★★★

* 대중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 연기 : ★★★★★
* 음악 :
★★★★★





 

꽤 오래전에 썼던 글 (99쯤? )





  |  

[아이즈 와이드 셧] 내러티브 분석

2007. 2. 12. 10:22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리뷰입니다. 스포일러 (약간) 있습니다.
스포일러 불안을 갖는 독자는 피하시길 바랍니다.  


0. 불경스런 경배를 

만약 영화를 종교에 비유할 수 있다면, 영화라는 종교에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받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화신도라면, 영화관은 그들의 성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큐브릭교도'라면 이제 큐브릭은 십자가에 못 박혀있다. 큐브릭은 전대미문의 영화들을 '창조'해왔다. 큐브릭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엔 큐브릭에게 '경배'를 바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큐브릭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모험이거나, 그저 의미 없는 질투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큐브릭은 영화를 '뛰어넘으려고'했다. 큐브릭은 영화가 역사이며, 철학이며, 문학이며, 음악이며 그 모든 것들의 종합이자 그 이상이라고 믿었다. 영화는 그것이 '싸구려 구경거리'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자신의 지형도와 영향력을 점점 더 확대해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예술로서 거듭 태어나도록 만들어준 영화 '오디세이'의 영웅들, 그 모험가들 중에서도 큐브릭은 유난히 빛나는 이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큐브릭에게 바치는 경배는 큐브릭의 모험처럼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것이어야 한다. 큐브릭은 자신의 영화가 읽히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 채 그저 암송되고, 찬양되는 메마른 경전이 되기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경배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 우리의 경배는 신성모독이어야  하는 것이다.


푸코는 '반동주의의 회상장치'라고 영화를 비판했지만 '모든 말한다는 것은 권력에의 실천이자 복종'이라고 또한 말한다. 이 글은 푸코의 문제틀로 <Eyes Wide Shut>에 접근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푸코의 '권력과 담론'의 상관관계에 관한 성찰들이 매우 유용해 보이기 때문이다. 큐브릭에게 세상이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절망스런 수수께끼였다면, 우리가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큐브릭에게 동참하는 것은 큐브릭의 신화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큐브릭을 긍정적으로 저주하고, 모독하고 그럼으로써 그을 부활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1. 미로  

큐브릭의 유작이자 그의 13번째 작품인 <Eyes Wide Shut>은 13이란 숫자가 상징하는 불길함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마치 데이빗 린치의 악몽과도 닮아 있다. 뉴욕의 성공한 의사인 빌 하퍼드(톰 크루즈)와 그의 아내 앨리스(니콜 키드먼)의 성적인 환상으로 영화는 채워져 있다.

그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Eyes Wide Shut>는 일견 평범한 스릴러처럼 보인다. 성공한 미국의 와스프 부부가 성적 위기를 극복하고, 일상에 복귀한다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의 구조처럼 이야기는 짜여져 있다.


그러나 큐브릭은 첫 장면부터 기존의 전형적인 헐리웃영화와는 전혀 다른 시작을 보여준다. 앨리스가 처음 등장하는 '화장실 장면'은 니콜 키드만이 갖고 있는 여배우로서의 신비감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여배우로서의 니콜 키드만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성공한 부부커플인 탐 클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존재한다. 그들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영화속 가공의 인물인 빌과 앨리스의 이미지에 중층적으로 겹쳐진다. 그래서 마치 '명료한 꿈의 세계'(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처럼 우리는 가상의 세계에 있지만, 그 가상은 실재의 세계와 겹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의 인과관계가 아니다. 큐브릭은 오히려 인과관계의 플롯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위에는 어떤 뚜렷한 동기도 찾아볼 수가 없으며, 사건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 남아있는 것은 현실과 꿈이 뒤섞인 잔상들이다. 그 잔상들은 어쩌면, 큐브릭이 생각하고 있는 영화 자체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속성, 앞서 인용한 푸코의 말을 재인용하자면, '보수반동의 기억장치'로서의 영화에 대해 큐브릭은 그 한계에 대한 절망과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마지막 성찰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큐브릭은 일상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평범한' 화면으로 보여준다.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차원을 거듭하여 개척해왔던 기존의 큐브릭 영화와 비교해서 이 영화의 테크닉은 거의 초보적인 수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큐브릭자신이 의도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이 어떤 놀라운 스펙터클의 세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꿈의 연장인자, 그 꿈을 조정하는 권력과 담론의 연장으로서의 일상은 깜짝 놀랄만한 별천지가 아니며, 오히려 익숙한 듯 낯설은 공간이다. 영화는 그런 몽환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미장센을 완벽하게 '설계'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이즈 와이드 셧 (Eyes Wide Shut, 1999)  
스탠리 큐브릭 (Stanley Kubrick)
영국. 160 분. 개봉 2000.09.02


2. 권력과 욕망 그리고 지식


<Eyes Wide Shut>에서 인물들은 현실과 꿈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권력과 담론의 세계라는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 모든 인물들의 일상은 뒤틀려 있지만, 그 뒤틀린 이미지들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원형적인 시스템으로 정착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지글러는 빌의 상징적인 '아버지'이다. 그는 권력과 정보를 갖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일상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정한다. 빌을 '자신이 용납한' 쾌락으로 초대하기는 하지만(크리스마스 파티), 자신과 같은 쾌락의 세계로 들어오려는 빌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난교 파티). 빌은 자신의 아내로부터, 지글러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의식의 세계에서는 질투의 감정으로 표현되지만, 그 감춰진 모습은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모방심리이며, 그 모방심리의 기저(基底)에는 마치 본능과도 같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영화는 앎과 권력의 문제로 들어선다.


그 정보를 제공해주는 인물은 지금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대학동창인 닉이다. 그는 욕망의 세계에서 일개 연주자, 구경꾼에 불과하지만(그러나 그는 눈가리개를 하고 연주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는 못한다), 빌에게 있어서는 그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하나의 열쇠다. 그 난교 파티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감춰야 한다. 마치 일상의 욕망들이, 그 욕망을 조정하는 권력의 시스템이 스스로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욕망의 실현은 자신을 감추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깨려는 사람(난교 파티에서 빌을 구하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녀가 죽은 지글러의 섹스파트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의 죽음은 상징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난교 파티의 한 영상을 상징하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가 난교 파티의 여자인지 혹은 그저 마약으로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길거리의 창녀가 난교 파티의 여자인지도 같은 이유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권력이 죽음과 관계하는 방식, 성에 관계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진행되어 그것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천천히,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시스템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권력과 지식을 획득해야 하지만, 지식과 권력은 서로 담합하여, 우리를 제외한 '소수'을 위해서만 복무한다. 우리에게서 그것은 너무 멀다. 우리는 어떻게 지식과 권력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마르크스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듯 했지만, 현실은 그 역시도 실패했음을 아프게 증명하고 있다.



3. 일상으로의 회귀

과연 큐브릭은 의도는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큐브릭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큐브릭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답'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통해 큐브릭이 우리에게 주는 전언은 어쩌면 절망적으로 보인다.
 

앨리스와 빌의 일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해서, 딸아이의 선물을 사는 일상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에서 그러나 일상적인 것들 속에 스며들어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욕망들은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한다.
 

앨리스가 빌에게 '다짐하는' 섹스는  큐브릭 특유의 블랙유머일 뿐이다. 사건은 그저 미궁에 빠져 있으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과연 사건인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은 환상처럼, 몽환처럼 일상과 비일상이 뒤섞인 채 잔상만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큐브릭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이 영겁회귀하며, 이 잔인하고 기만적인 현대라는 시스템이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과 지식과 욕망이라는 문제는 큐브릭의 영화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였지만, 마지막 영화인 <Eyes Wide Shut>에서 큐브릭은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고, 그저 비관적인 문제제기로 자신의 유언을 대신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큐브릭이 성찰하는, 영화라는 매체에 일종의 메타포라면 큐브릭은 마치 모든 것을 이루어놓은 뒤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성찰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하나의 환상이며, 그 환상은 일상과 관계하며 일상과 뒤섞인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영화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 사라지는 것은 그저 사라질 뿐이고, 반복되는 것은 그저 그렇게 반복될 뿐이라고 큐브릭은 낮은 어조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큐브릭의 마지막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잔인한 현대의 시스템 속에서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를 얻은 셈이다. 큐브릭의 절망은 '상징적인 절망'이기 때문이다. 그 절망을 통해 우리는 절망을 이기는 방법을 역설적으로 발견해내야 한다. 그것은 큐브릭이 우리에게 침묵을 통해 말하는 진정한 전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별점

* 총평점 : ★★★★1/2

* 영화적 비전 : ★★★★★
* 대중 친화도 : ★★1/2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팁 - 남녀주인공의 이름]

1.
[Bill](탐 크루즈 극중 이름), 이거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상징하는 이름이다. Bill 혹은 bill.
그건 William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건 청구서이고, 동시에 지폐를 의미하니까.


2.
[Alice] 도 마찬가지로 영화의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떠오르지 않나?



2000년 혹은 2001년 쯤 쓴 글 추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