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21

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미수다와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강간대국의 정체

2007. 11. 22. 11:44  |   TV/방송/광고  |   키노씨
0.
가장 신뢰하는 매체인 '프레시안'마저도 '미수다' 관련 기사를 연합뉴스에서 업어온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한국 최고의 칼럼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고종석씨도 예전에 매우 호의적으로 '미수다'에 대해 한 말씀 날렸다.

포털 하청업체인 연예 찌라시 업체들은 두 말하면 입아프고, 블로거들 역시 [미수다]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매우 높다. 현재 미수다의 핵심 키워드는 '자밀라'와 '윈터'인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미수다 사건' 한국인이 부끄럽다]는 글을 '다음 블로거뉴스'에서 전략적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현재 스코어 24만의 21만의 조회수를 기록중이다. : )
가볍게 첨언하자면 나는 이 글의 취지에 대체로 공감한다. 물론 '우리나라 네티즌 부끄럽다'류의 과장된 수사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자밀라와 윈터 사건(?), 그리고 이에 대한 도미니크의 발언으로 말이 많지만,
아무튼 '미수다' 전성시대라고 할만하다.


1.
'미수다'를 나는 꾸준히 시청하지도 않았고, 솔직히 거의 시청하지 않는 편이고(-_-;), 그렇다고 '미수다'를 앞으로 시청하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미수다'는 보기에 즐거운(이쁜 ㅡㅡ;) 외국 여성들 업어다가 꽃단장 시켜놓고, 이런 저런 농담 따먹기에 열중하는 오락 프로그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건 비난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까 '미수다'는 기본적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주로 백인) 쭉빵녀에 대한 남성들의 이국취향과 관음증에 기반하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거 듭 말하지만 이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무슨 도덕적인 엄숙주의자라거나, 혹은 모든 TV 프로그램들이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 전혀 없다. 오히려 위장된 형태로 시청자들 훈계하는 유사 휴머니즘, 유사 도덕론의 가면을 쓴 막장 저질 프로그램(이를테면 TVN의 '독고영재의 스캔들'이랄까.. )을 저주하는 편이다.

그렇다.
나는 포르노 합법화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2.
고 종석의 솔직한 고백처럼 (다수의 남성 시청자들이) "이 프로를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은 새뜻한 외국 여성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텔레비전의 이런저런 오락 프로그램에 비치는 한국인 여성들 역시 거의 다 미인"인 판국에 "출연자들이 죄다 미인이라는 것 역시 끄집어내 지적할 악덕이랄 순 없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미수다'는 매우 훌륭한 외모를 소유(!)한 이국처녀들이 "우리말로"(고종석은 특히 이걸 강조하더라) 한국 풍속, 그리고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이모저모수에 대해 수다 떠는 오락프로그램이다. 이것이 "한국인 시청자들이 전혀 몰랐던 걸 이 외국인 여성들이 가르쳐 주는 것 같진 않다. (...중략...) 대개는 한국인이 잘 알면서도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거나, 외국에 대해 올바르게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해 주는 정도다"(고종석). 공감한다.

"인형들의 전시장"(고종석)에 머물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는 고종석의 지적들은 직접 음미하기 바란다. 모두가 (개인적으론 너무 호의적이고, 온건해서 좀 그렇지만)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3.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왜 굳이 '미수다'에 대해 끄적거리는건가. ㅡㅡ;;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하다.

내 가 느끼는 '미수다' 현상의 흥미로운 지점은 미녀 외국인이 한국말로 떠드는 이야기들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성향 매우 강한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이걸 계량화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이를테면 위 이은호님께서 지적한 "부끄럽다"류의 반응은 '미수다'에서 이야기된 한국적인 어떤 문화, 제도적인 모순에 대한 지적에 대한 일반적인 시청자들의 반응과 큰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끄럽다는 거다.
쪽팔리다는 거.


4.
제목이 좀 거창한데, 오리엔탈리즘이란게 별게 아니고, 서양이 동양(오리엔탈)에 대해 덧 씌어놓은 일종의 위장된 체계, 서양의 정체성을 보전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동양을 절대적인 타자로 설정한 담론들의 체계라고 이해하면 쉽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서양이 표상하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가짜 진실을 공고하게 세우기 위해 동양은 주술과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리따운 외국미녀들이 우리나라 사회의 모순들, 이런저런 못마땅한 풍속들을 이야기한다. 그건 이미 있어왔던 사회적 모순이고, 병폐들이다. 가령 윈터의 '성폭행' 이야기는 그 가장 상징적인 예시일테다. 이것이 고쳐질 필요 없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태도가 무작정 "우리나라 부끄럽다"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더욱 우려하는 건 이런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이 절대선인 것처럼 다른 고민들을 지워버린다는 거다. 가령 성범죄자의 인권문제는 논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강간대국'이라는 (그 출처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강화된다.

어떤 자극적인 이슈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들은 그 이슈가 제기하는 어떤 제도와 풍속의 모순과 비합리성에 대한 의미있는 시사점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개선되고, 고쳐지는데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서 그냥 한번 뜨거워지다가 마는 수가 많다. 그리고 '성범죄 때려잡자'류의 선동은, 그 자체로 성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이성적인 고민, 국가공권력의 행사범위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논의를 묵사발내는 효과를 갖는다(이에 대해선 따로 글을 쓰고 싶다... ).  

제도와 풍속의 어떤 지점이 정말 문제인지에 대해 좀더 이성적으로, 좀더 냉정하게 접근하는 태도가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외국의 미녀들이 성폭행 당했다.
신고했는데 창녀라고 거절당했다.
우리나라 부끄럽다.

이런 선정적인 단편들을 엮어서 얻어질 수 있는 건 극단적인 감정적인 폭주와 민족주의적이며 감상적인 감정의 과잉(우리나라 부끄럽다 류의), 혹은 전도된 변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일 뿐이다.

어 떤 한 개의 사례가 모두를 대변할 수는 없고, 미수다 출연진의 한 명이 그 사건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외국인 전체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로 치환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나라만큼 '백인'(!)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인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딨나? 이와 함께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그 잔인한 시선과 태도들은 또 뭔가?

배타적인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서구 문화에 대한, 특히 백인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무비판적인 접근방식도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스스로 내면화시킨 오리엔탈리즘의 문화적인 발현이지 않나 싶다.


5.
'미수다'에 건의하고 싶은게 하나 있다.
쭉방 모델 자밀라로 장사하고 싶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외국 아가씨 말고도 정말 고생하는 동남아 외국인 아가씨들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아가씨들 중에서 쭉빵(ㅡㅡ;)한 아가씨들 고르면 되지 않나.
이런 한국에 거주하는 다수 외국인을 대표할 수 있는 '평범한' 아가씨도 좀 섭외하길 바란다.
그 3D 업체에서 일하는 쭉빵 외국인 노동자 아가씨들 이야기도 좀 들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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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여기

형사정책연구원은 지난 12일 ‘주요 국가의 범죄발생추세 비교’라는 제목으로 연구 결과를 홈페이지(www.kic.re.kr)에 공개했다.

(... 중략 ...)

'서울과 부산 등 한국 주요도시의 외국인 상대 성폭행 범죄율이 아주 높은 수준;이라는 캐나다 외교부(www.voyage.gc.ca)와 미 국무부 웹사이트(www.state.gov)의 ‘경고’를 무색케 한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www.prkorea.com)는 “해당 웹사이트에 공식 항의했으나 조사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며 지난달 홈페이지에 올린 내용을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고 밝혔다.
* OECD:성폭행사건(인구10만명당)[2003년]

1 오스트레일리아 81.4
2 캐나다 78.1
3 미국 32.1
4 아이슬랜드 26.0
5 뉴질랜드 22.5
6 벨기에 16.6
7 영국 16.2
8 스웨덴 14.7
9 프랑스 14.4
10 스페인 14.3
11 멕시코 13.3
12 한국 13.0
13 노르웨이 12.4
14 핀란드 11.2
15 네델란드 10.4

ㄱ. 성범죄률에 대해선 한 마디 하고 싶은게 있는데, 통계청을 가봐도, 형사정책연구원 사이트를 가봐도, 대검찰청 사이트를 가봐도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 신뢰도 높은 통계치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 다. 통계청을 뒤저보니 '성범죄 통계'를 알고 싶다고 문의했던 기록까지 있는데, 그 답변의 링크를 쫓아가봤지만, 뜬금없이 서비스 형식이 바뀌었다는 안내창이 뜬다. ㅡㅡ;; 이런 통계치에 대해 궁금한 국민들은 당연히 국가기관에서 이런 정보를 쉽게 입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국가가 '알 권리'의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해줘야 하는 당연한 서비스라고 생각하는데... 좀 많이 짜증난다.

ㄴ. 우리나라의 성범죄률이 낮은 이유는 유교적인 문화권인지라 '성범죄'에 대한 신고률이 낮다는 지적이 있는데, 적절한 지적인 것 같다. 다만 그렇더라도 그런 정황만으로 우리나라의 성범죄률이 높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ㄷ. 오히려 성범죄 재발을 방지하는 형사정책적 방법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논의를 좀더 생산적으로 이끌지 않을까 싶다. 성범죄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성범죄자의 인권(프라이버시)보다는 정책적 목적(재범 방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일련의 움직임(전자팔찌 도입에 관한 움직임이랄지, 유아 성범죄에 대한 범죄자 정보의 확대 공표랄지.. )이 좀더 활발히 토론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2.
한국의 성범죄자에 대한 짧은 이야기 / 일지 2007/10/18 23:53
성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짧은 논평을 기록한 글.
http://zizec.tistory.com/trackback/1

3. 여기
경 찰청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2005년) 성범죄는 1만 3446건으로 2004년의 1만 4089건보다 줄었지만, 7~12세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2003년에 492건이던 것이 2005년 584건으로 증가하고 있고, 거기에는 남자아이의 성폭력도 늘고 있어 부모의 공백이 직간접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4. 관음증적 '미녀들의수다'와 경박한 미디어 [뉴시스 2007.11.17 12:19:19]
그나마 추천할 만한 기사.



* 이 글은 예외적으로 제 메인블로그인 민노씨.네에 동시등록합니다.
물론 메타사이트에는 중복발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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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픽스, 메멘토, 박하사탕과 돌이킬 수 없는 - 내내님과의 대화

2007. 11. 6. 01:25  |   프리뷰  |   키노씨
0. 이 글은 '돌이킬 수 없는'에 주신 내내님(내가 내냐)의 논평에 대한 답글입니다.
제 볼 것 없는 글에 이토록 풍성한 논평을 주신 내내님께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하 내내님께서 주신 논평은 회색박스로 처리합니다.


1. 트윈픽스의 빨간 방.

특히 저 포스터는 즉각적으로 트윈 픽스 마지막장면의 빨간 방을 연상케 했어요.

[트윈픽스]의 '커튼으로 가려진 빨간 방'과 [돌이킬 수 없는]의 지하도 이미지는 내내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유사하네요. [트윈픽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데이빗 린치의 작품입니다. 물론 영화판이 아닌 TV판으로 말이죠.

다만 [돌이킬 수 없는]의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지하도는 [트윈픽스]의 빨간 방보다는 좀더 날 것의 느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이미지 모두 몽환적이고, 욕망의 가려진 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돌이킬 수 없는]의 지하도가 좀더 현실에 가깝다면,  [트윈픽스]의 그것은 좀더 무의식, 몽환, 꿈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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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픽스]에 등장하는 붉은 커튼으로 둘러싸인 방.
어떤 평론가는 백악관에 대한 메타포라고 해석하더라(정성일).



2. 내러티브의 시간 : 박하사탕, 메멘토와 비교

ㄱ. [메멘토] 경우

똑같이 과거를 거슬러가는 이야기구조이긴 하지만 메멘토는 그 과정에서 기억의 상실과 재구성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통한 진실의 왜곡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진실의 실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규정해야하는가란 문제를 미스테리적 재미를 곁들여 제시하고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인 주인공 레너드의 기억의 재구성이 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럭비공같은 불확실한 것이기에 메멘토의 반전퍼레이드는 설득력의 획득을 넘어서서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는 메리트를 확보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억지와 과장을 느끼게 하긴 커녕 다음엔 어떤 반전이 펼쳐질지 기대마저 하게 만듭니다.)


ㄴ. [박하사탕] 경우

박하사탕은 김영호란 인물의 과거로의 회귀과정을 따르면서도 한국사회가 현대화과정을 거치며 발전하는 동안 김영호개인(그는 시대의 발전이란 미명하에 희생된 그 시대 사람들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지지요.) 이 현재로 이동하며 잃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그려내며 마지막 장면과 첫 장면의 공간과 무대가 일치할 수 밖에 없는, 바꿔 말하자면 김영호의 한국현대사 참여의 시작과 마지막의 공간이 동일하다는 불가항력에 관한 수미쌍관법을 소설적으로 완벽히 선보였다면


ㄷ. [돌이킬 수 없는] 경우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배열했을 뿐인 [돌이킬 수 없는]을 보고 느낀 뒷담은 우습게도 "말이 씨가 되니 말조심을 해야되는구나..." 정도밖에는 없었습니다. (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도에서 뒹군다는 꿈과 벵상 카엘의 애널섹스욕구가 현실화되잖아요?)

굳이 찾자면 모니카 강간범이 아닌 엉뚱한 남자에게 복수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그건 그 뒤로 전개되는 플롯과 아무 관련이 없는 단순한 오해일 뿐이지요. 거기다 화면전환시 반복되는 카메라 빙빙돌리기는 짜증만 났구 결정적으로 모니카 벨루치의 외모와 명성에 비하면 너무 눈요기용으로 전락시킨 느낌이 들어서요. 이건 돌이킬 수 없는 뿐만 아니라 그녀가 출연한 모든 영화가 마찬가지였습니다.


[메멘토]와 [박하사탕]에 대해 주신 말씀은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돌이킬 수 없는]에 대해 실망감을 피력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좀 달리 판단하는데요. 제 관점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에서의 시간의 역순 구조는, 그런 내러티브 구조는 이 영화의 비전과 정확히 부합하는 '방법론'이었다고 판단하고, 또 충분히 영화적으로 설득력있게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도 말씀 드렸듯, 욕망이 원형적으로 순환하고, 회귀하며 또 그렇게 '모순'에 찬 상태로, 스스로가 죄를 만드는 형식으로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울한 묵시록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것이 정말 과감한 이미지들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고 판단해요.

그리고 '대상의 착오' 부분은, 매우 의미심장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복수가 실현되었을 때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정의의 성취,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설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관습적이고, 평면적인 '감상'을 전복시키는 시도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균열로 느껴지신다는 내내님의 말씀에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지만, 이와 함께 영화 전체가 갖는 묵시록적인 비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의미있는 에피소드이자 '사건'이라고 평가될 만한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복수, 인간의 정의가 갖는 한계랄까, 그 부질없음이랄까, 좀더 나아가면 '우연'을 통해 실현되지 못하는 복수, 혹은 정의가 실은 좀더 커다란 지배적인 구조, 숙명적인 조건에 대한 조소 혹은 유머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데리다가 시도했던 '전체''의미'의 이성적인 구조에 대한 해체랄까, 전복적인 시도랄까 그런 것이 느껴졌어요.


3. 라스트

그러나 자칫 3류외설물로 전락할지도 모르던 영화가 간신히 바닥치기를 모면한 것은 마지막 장면덕이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이 흐르면서 보여지는 모니카의 행복한 모습은 일반적으로 구사되는 "행복하게 시작했지만 결말은 비극적이다." 내지는 그 반대구조의 일반적 내러티브형식이 아니라 처참한 비극으로 결말지어지는 시작을 먼저 제시한뒤 과거로의 복기장면나열을 통해 마지막에 보여지는 이야기의 첫머리는 결론의 암시나 상징이 아니라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닌)스타트`였다. 라는, (써놓고보니 웃기는 단어군요.) 어찌보면 간단한 뒤집기이지만 기발한 착상의 영화문법의 하나였습니다.

박하사탕의 경우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김영호의 아픈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이 들어가있는 반면 돌이킬 수 없는 의 마지막은 완벽한 해피스타트이죠. (배경에 깔리는 비장한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유심히 들으면 완벽한 해피라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기도 합니다.) 이 형식적 일탈행위의 시도로 인해 얻어진 효과는 아니러니하게 영화를 다 본후 행복하게 끝난 기분좋은 영화 한 편을 보는 착각까지 느꼈다는 겁니다. 그 주역이 모니카 벨루치라는 극강의 미모의 소유자였기에 착각의 농도가 더욱 더 짙어질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런 미인이 상상조차 못할 극한의 상황에 내팽겨치는 것에 절대 익숙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태아포스터를 깔아놓은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지만 이런 유형의 영화엔 전혀 어울리지 않더군요.

저로선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감상은 오히려 공포, 소외, 부질없음, 고립감, 이런 영원한 고통과 모순들의 영겁회귀... 이런 이미지들을 극적으로 증폭시키더군요. 그래서 그 끔찍함, 그 허망함이 아주 극명하게 고조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졌구요. 그 '역설적인' 해피엔딩의 방식이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는 '블랙 유머'로 처리되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에서는 좀더 노골적인 대조를 통해서 형상화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제 감상과 판단이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일단 이것으로 제 대답을 갈음할까 싶습니다.
다시금 풍성하고, 깊이있는 논평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오아시스]에 주신 논평에 대해서도 조만간 대답을 드릴까 싶네요.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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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수용소에서 푸는 홀로코스트 퍼즐 - 인사이드 맨 (2006)

2007. 11. 3. 08:45  |   리뷰  |   키노씨
#. 스포일러에 대한 고려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다만 관극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정도의 스포일러는 없(는 것 같)습니다.


0. 역사 - 홀로코스트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비유적으로 묘사된다.
어떤 사실에 대한 흔적으로서, 그 내면화된 관성으로, 어떤 풍경처럼 그렇게, 인물들을 그 기억 안으로 가둔다.
'Inside Man' 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중층적이다.

911의 흔적으로 이 영화를 분석하는 시도들은, 911 이후 미국의 분열적인 모습을 표현하거나, 혹은 아(안)/적(밖)의 교란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이것이 911이후의 미국사회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고 보기엔 좀 무리인 것 같다는 거다. 물론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그 해석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해석은 자유니까. 다만 그 해석이 그저 외적인 유사 이미지에 의한 것이라면 어쩌면 [인사이드 맨]의 진정한 전언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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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강도, 혹은 진실의 사자들

인사이드 맨 (Inside Man, 스파이크 리. 2006)     
미국 / 추리극. 역사극 / 128 분 / 개봉 2006.04.21

덴젤 워싱톤 Denzel Washington    :  키스 프레지어 역
조디 포스터 Jodie Foster    :  마들린 화이트 역
클라이브 오웬 Clive Owen    :  댈튼 러셀 역

크리스토퍼 플러머 Christopher Plummer    :  아서 케이스 역
윌렘 데포 Willem Dafoe    :  존 다리어스 역

외피의 내러티브는 은행강도 이야기다.
것도 굉장히 기상천외한 은행강도 이야기.
그 은행강도가 빈라덴이나 알 자르카위나 잠재적인 적인 아랍인에 대한 대유일까?
이건 전혀 아닌 것 같다.

영화는 의외의 풍경들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1. 퍼즐 -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그리고 [쇼아]

미국의 실증주의적인 역사학자들은 홀로코스트가 유태인들의 공포가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더라(정성일한테 들은 얘기다). 그래서 만들어진 영화가 그 유명한 다큐멘터리 [쇼아. Shoah(멸절)](1985. 끌로드 란쯔만)다. 화면 가득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끊임없이 진술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저 그 살아남은 자들의 얼굴, 그 눈빛의 떨림, 그 흐느끼는 목소리만으로 그 야만의 '진실'을 증명하는 영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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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되는 인터뷰

각설하고, [인사이드 맨]은 [쇼아]의 방법을 차용하면서,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터뷰가 [쇼아]의 방법이었다면, 진실 그대로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영화가 아니라, 퍼즐과 스릴러라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선 상업영화의 코드를 쫓는다. 그건 좋다/싫다를 말할 수는 있지만, 옳다/그르다를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이 퍼즐은 꽤 즐겁다.

이건 스포일러라서 좀 꺼려지지만( -_-;; )
[인사이드맨]이 빌어오는 퍼즐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이다.


2. 미장센 - 2006년의 미국 ; 혹은 수용소

스파이크 리의 장점은 선동적인 에너지다.
다만 그건 실패하기 쉬운 장점이다. [인사이드 맨]에서 스파이크 리는 [말콤X]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렇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무슨 의미겠는가?

무엇인가 말하려는, 설득하려는 선동적 에너지는 쉽게 계몽적이며, 권위적이며, 목소리만 높아지는 오류에, 유혹에 빠진다. 그런데 [인사이드 맨]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인사이드 맨]에서 진짜 전언들, 그 스파이크 리의 목소리는 화면 속에 숨겨져 있다. 진실은 항상 숨겨진 방식으로 드러난다.

[말콤X]가 그 도식적인 화면톤의 변화, 그 뻔한 스토리의 전개, 그리고 역시나 계몽적인 수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인사이드 맨]은 훨씬 복잡하고, 좀더 풍성하다. 나로선 [인사이드 맨]의 가장 놀라운 성취는 그 화면의 설계면서, 그 화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문득 문득의 미장센들이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으며, 갇혀 있는데, 놀랍게도, (은행에) 갇혀 있는 자들과 (미국이라는 기만과 억압에) 갇혀 있는 자들은 문득 문득 겹친다. 그러니 미국이라는 거대한 억압과 기만의 장치, 그 거짓말 상자 속에 인물들은 모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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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바깥, 또 다른 수용소

그리고 인질들은 누가 범인인지 알지 못하고, 모두가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그건 아주 비유적이지만, 분명하게 미국의 본질을 까발린다. 그들은 갇혀 있는 자들이며, 미국은 일종의 수용소에 불과한 거다. 그 지점에서 911의 기억이 만든 또 다른 수용소 미국의 이미지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으로서의 아우슈비츠와 겹쳐진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이라는 야만 위에 구축된 국가주의의 흔적이라는 점은 같다.


3. 역사적 진실과 그 해결 - 가짜 해피엔딩 ; 혹은 아이러니, 또는 유머

스파이크 리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덴젤 워싱턴은 역사의 진실을 믿는 자이고, 그 직업은 형사다. 조디 포스터는 그 역사적 진실을 덮기 위한 자본의 하수인으로 등장하고, 그 가운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 진실을 까발리기 위해 은행강도로 등장하는 클라이브 오웬이 있다. 그들의 승부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물고 물린다. 현실은 그런 난잡한 이전투구이며, 정치는 경제와 공모하고, 그들은 진실을 가장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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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들은 거래하고, 은폐하려고 한다.

그런데 영화는 손쉽게 해피엔딩으로 나아간다.
[인사이드 맨]에서 가장 아쉬운 건 그 결론이다.
정말 미국이란 사회에서, 그 기만의 공장에서 '진실'이라는 통조림을 만들기가 이렇게 쉬운 걸까?

그런데 그건 어쩌면 아이러니로서의 결론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유태인이 지배하는 미국사회에서 '껌둥이' 흑인이 그 유태인을 도와 나찌의 기억, 그 진실을 파헤친다. 그게 설마 가능할라구? -_-; 그러니 이 해피엔딩은 농담이거나, 유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결론은 정말 섬뜩한 결론이면서, 교활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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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소수자들, 흑인과 유대인


[인사이드 맨]은 결론의 불가해함, 혹은 그 함정을 염두에 두더라도 정말 의미심장한 영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어쩌면 스파이크 리 최고 걸작일지도 모른다.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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