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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나는 영화다

2006. 11. 20. 20:22  |   프리뷰  |   키노씨


본질.
나는 영화(映畵)다. 영화(映畵)는 영화(零化)에 대한 저항이다. 저항은 어떤 경향에 대한 반대편으로의 도주이자 맞섬이다. 다시 질문하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영화다. 영화는 없어지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저항은 어떤 것이 되는 것, 그 되는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것, 혹은 그 되는 방향을 틀어버림이다. 아무 것도 결코 스스로 사라지는 법이 없다. 영화는 그 없어지게 하는 것들,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붙잡음으로서, 달리 말하자면 그 영화(零化)의 관성을 무한복제함으로써 그 영화(零化)를 정지시킨다.


영화는 사라질 수 없는 세계의 의미들, 바흐친의 어투를 빌자면, 의미의 불소멸성과 귀향을 새로운 방식으로 교란하며 정지시키며 흘러가게 하고, 회귀토록 한다. 일종의 환상 신호등. 그 교란. 그렇다. 영화는 혼란을 통해 스스로를 세계에 드러낸다. 이미지-액션의 무한복제. 무의식과 의식의 교란. 그러나 지금 영화는 스스로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와 긍정의 이미지의 혼동 속에서 아이의 머리를 한 거대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그 경계가 모든 사물의 본질이라는 명제를 믿는다면 영화의 혼란은 당연하며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제 환상신호등의 불을 빨간색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질주를 위한 잠시 멈춤.



관계.
아주 진지하게 묻자. 당신은 어떻게 나를 아는가. 내가 당신의 이성과 감수성의 씨줄과 날줄로 무수하게 엉켜진 그 복잡하기 그지없는 회로들과 만나는 방식. 그것은 이 글이다. 나의 어투, 나의 문법이라는 배경과 그 배경을 만들어 가는 개개의 단어들을 통해 당신은 나라고 생각되어 지는 이미지들과 만난다. 그것은 그렇지만 착각이다. 나를 이루고 있는 편린들, 그 편린들의 일부, 극소수를 통해서 당신은 나의 이미지의 지극히 협소한 부분과, 지금, 조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만질 수 없는 촉감이며, 잡을 수 없는 몽환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나와 만나고 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 텐가. 그렇다. 그것은 기적이다. 기적. 나는 영화이며, 영화는 기적이다. 그것은 그러나 이제 일상화되어 있다. 그 일상화된 기억들의 고정과 고정의 변주를 통해 이어지는 낯선 기억들과의 재회. 그것이 삶이다.



관계-현실.
나는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나는 영화의 이미지들을 통해 그 영화의 본질들과 만난다. 그 본질. 그 본질이 드러나는 방식은 관계를 통해서이다. 모든 존재들의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 관계이듯, 나와 나인 영화와 우리인 영화는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 신비로운 베일을 벗는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그것은 이미지의 잔상들이다. 그 잔상들의 이어짐을 통해서 우리는 영화와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만질 수 없는 물질성이 영화의 ‘육체적인’ 속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이것과 다른가. 그 본질은 같다. 우리는 우리가 영화를 만나는 그 방식으로 세계와 만난다. 우리가 우리를 구성한다고 믿는 그 알갱이들. 그 본질들은 그러나 우리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들의 끊임없는 질주와 정지과 교차인 것이다.



정치.
영화는 아주 힘 쎈 아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 아이가 어른이 되게 하는 일, 당신이 나와 만나는 일.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영화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나와 나인 영화. 나는 영화인 것이다. 참여하도록 선동하고, 그 선동이 삶의 방향을 틀도록 누구나 고함을 질러야 한다. 그 고함은 그러나 비유적인 고함이며, 외침이다. 모든 속삭임, 아무 것도 없는 침묵은 그러나 고함인 것이다.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하는 나의 속삭임. 나는 영화이며, 영화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개인적 기억의 공장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 공장의 노동자가 나는 되려고 한다. 멋지지 않은가. 내가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노동자. 환상신호등의 파수꾼인 것이다. 그것이 욕망과 소망의 이율배반 속에서 조화롭게 스스로 미쳐갈 수 있도록.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경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숙주를 통해 자라는 하나의 곰팡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의 숙주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의 욕망이다. 그 자본을 움직이는 것은 자본 그 자체이다. 그것이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만들어주는 윤활유에 불과한 것. 그것은 가정과 국가, 그리고 기업이다. 당신은 기업인가. 영화는 문화이면서 산업이다. 내가 뛰어들려는 것은,  내가 나인 영화를 다시 만나려고 하는 방식은 문화인가. 산업인가. 라고 끊.어.서 물어볼 수 없다. 우리는 곰팡이에 불과하니까. 그걸 부정할 수 있는가. 그걸 부정하는 순간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소멸해야 하는 시간이며,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순간이며, 죽어야 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시스템의 교란과 탈선을 부추길 것인가. 거기에 편승할 것인가. 선택은 그 때 그 때의 상황들이 대답해준다. 나는 그리고 나인 영화와 우리인 영화는 교활해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는다면 아무도 더 이상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이것은 딜레마이면서 숙명이다. 그 숙명적인 딜레마의 正義는 교활해지는 것. 그리고 좀더 기회주의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주의와 교활함의 날렵한 혀 놀림. 그것은 위선인가. 아니. 그것은 진실의 제스처를 한 기만을 발가벗기는 일이며, 세상의 진실이 우리들의 진실이 되게 하는 방법론적 전략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는 영화이며, 영화는 진실이며, 그 진실은 숨겨진 방식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진실도 그것 자체로, 알갱이인 그 자체로 드러나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곰팡이이며, 그것이 관계를 부패시킬 것인가, 아니면 숙성시켜 발효될 것인가는 그 곰팡이의 외관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상적으로 떠올리는 어떤 과정의 시스템,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신비로운 회로 속에서 화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결론
나는 영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p.s.
나는 영화다, 라는 제목은 펠데리코 펠리니의 '나는 영화다'라는 표현에서 빌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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