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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진실과 행복한 거짓 - FM영화음악 버전

2006. 12. 15. 22:50  |   프리뷰  |   키노씨
만남

1. 내가 지금 쓰고자 하는 글은 나와 내 친구인 영화의 대화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나의 친구인 영화들은 그래서, 부버의 말투를 빌자면,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나의 친구인 영화들은 그러므로 대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하나의 존재다.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 나의 친구인 [나의 영화들]은 그래서 나와 관계 맺고 "우리는" 그 관계 속에 들어간다. 내가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2. 나는 영화가 무슨 거창한 진실의 목소리를, 진리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리라 생각지 않는다. 당신의 진실한 친구가 당신에게 거창한 진실이나 진리를 가르치는가? 영화는 그저 예술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대화할 뿐이다. 프랑스 영화사의 치욕적인 기억인 [Film d'art(예술영화)]는 영화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간혹 들리는 '예술영화'라는 수식은, 그 수식을 동반해야만 영화가 예술이라는 의도에서 사용된다면 여전히 영화에 대한 모독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 이미 예술인데, 거기에 굳이 예술이라는 수식을 붙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복음은 복음일 따름이다. 그것이 가짜복음과 순복음으로 유치하게 수식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나는 한때 카톨릭신자였을 뿐, 개신교에 대해서 어떠한 악의도 없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래서 내가 다시 찾아가는 영화들은 모두 그저 예술인 영화들이다. 그래서 굳이 예술영화라고 이름 붙이면 그 영화들이 나에게 화내며 토라질 것이 뻔하다. 그들은 그저 나의 친구들일 뿐이니까.

3. 내가 쓰는 영화에 대한 글은 [나의 친구들]을 당신에게 정중하게 소개하는 설레는 미팅순간이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친구들]이 나처럼 우정을 갖게 되길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우정은 소중하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하는 보석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지치고 힘든 날들을 견디게 하는 보약이니까. 그렇지만 당신에게 아부하기 위해 [나의 친구들]을 치장하거나 화장시키는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 그건 우리의 우정에 대한 배신행위니까. 다만 우리의 모습이 당신에게 조금이나 질투를 만들어, 나의 친구들을 당신이 빼앗아갔으면 하고 나는 바라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기꺼이 빼앗기겠다. 그 빼앗김이 더 커다란 우정을 우리에게 만들어 줄 테니까.

영화, 예술은 그 내밀한 우정들을 들키고, 빼앗기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염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조금 더 인간답게, 환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사 같은 친구들이니까. 설혹 [나의 친구들]과 당신이 이미 만난 적 있더라도, 다시 한번  만나서 새로운 우정을 나누고,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나는 나의 친구들이 자랑스러우니까. 그리고 그 친구들을 홀대한 당신에게 「그게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혹은 가짜친구들에게 현혹된 당신에게 「그들을 멀리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슬픈 진실과 행복한 거짓, 그리고 이미지 : 살아가야 한다는 것. 

1. 영화매체가 갖는 물질적인 속성은 그것이 그저 단지 이미지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로도 완전하게 고정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풍경들, 각자의 주형들 속에 그 이미지들을 다시 붙잡고, 변형시키고, 다시 자라게 한다. 결국 우리는 영화의 이미지들과 우리 자신의 내면의 이미지들을 함께 어떤 풍경 속에서 함께 자라게 할 수 있을 뿐이며, 영화는 그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좀더 분명하게 다시 말하면, 영화는 그저 단지 영화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산업이라고 예술이라고 어느 한쪽만을 부각하여 말하는 것은 온전하게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사지절단하여 어느 한쪽만으로 보려는 편협함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속에서 영화가 갖는 산업적인 속성과 예술로서의 영화매체가 갖는 어떤 기계적인 한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트뤼포의 애정 어린 3가지 계율, ⅰ… 같은 영화를 다시 볼 것 ⅱ… 그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쓸 것 ⅲ… 영화를 만들 것, 이라는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저 나는 영화가 어떻게 내 삶에 작용하며, 어떻게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소 감상적인 목소리로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2. 영화는 모든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는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그 조건들을 고민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이미지의 목소리들과 대화하며 우리를 자라게 하고, 세상 속으로 우리의 시선을 좀더 확장해 가는 것이다. 영화가 싸구려 오락이라거나, 절대적인 진리라는 두 가지 편향된 시선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영화는 그저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는 선택하고, 좀더 친해질 수 있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면,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 삶의 든든한 조력자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영화는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항상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행복과 슬픔의 경계에서 우리를 시험한다. 언제나 삶이 완전한 행복이나 완전한 슬픔이 아닌 것처럼 영화는 자기가 재현하는 세상의 진실과 행복, 거짓과 슬픔 속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그 고민을 우리와 함께 나눈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라는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다면 그 영화들과 계속 대화하고,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 속이어야 하며, 영화가 디즈니랜드의 공상과 꿈만은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영화는 영화다.
그 존재론적인 숙명은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는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 없다. 그 반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우리의 조건들, 그 실체들은 현존하는 하나의 알맹이들, 사실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실재하는 조건들만이 우리를 살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그 소망의 풍경들은 슬프게도 이미지일 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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