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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엑스맨은 근심을 그치고, 버라이어티 게임쇼을 사랑하게 되었나?

2007. 4. 9. 00:44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한겨레 블로그에 등록했던 글을 지우고, 추고해서 옮겨온 글입니다. 사유는 한겨레블로그의 정책에 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그런데 앞으로 볼 생각이 계신 독자들께서는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영화를 아직 안보신 독자는 글 초반부의 '엑스맨3 프리뷰"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그러니까 글 두개를 줄여서 추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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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 최후의 전쟁 (X-Men: The Last Stand, 2006)
미국. SF 코미디. 103 분. 개봉 2006.06.15.


 

브렛 라트너 

 
팜키 얀센(진 그레이)
휴 잭맨(로건/울버린)
할리 베리(오로로 먼로/스톰)

이안 맥켈런(에릭 렌셔/마그네토)
패트릭 스튜어트(찰스 자비에 교수) 

켈시 그래머(닥터 행크 맥코이/비스트). 안나 파킨(마리/로그).
레베카 로미즌(레이븐 다크홈/미스티크). 제임스 마스던(스콧 썸머/사이크롭스)










 

 어찌하여 엑스맨은 근심을 그치고, 버라이어티 게임쇼을 사랑하게 되었나?
                         - [X맨 ; 최후의 전쟁] 리뷰






0. 큐어는 맥거핀인가, 맥거핀이 아닌가?
아마도 많은 [엑스맨 3]를 본 관객들, 그리고 이 영화를 다룬 저널비평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큐어'다.
아다시피 '큐어(Cure)'는 엑스맨을 인간이 되게 하는 일종의 '치료제'(인간의 시각에선)다.

엑스맨3에 관한 프리뷰에서 나는 "큐어? 장난하냐? 이건 맥거핀이다"라고 썼다.
일종의 꼼수라는 의미였는데,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에 대해 한 블로거가 질문했다.
'그것이 왜 장난이냐? 왜 맥거핀에 불과하냐?' 라는 취지였다.
그리고 큐어는 꽤 중요한 서사진행의 핵심(소재)라고 지적했다.

나는 그 지적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엑스맨3]에서 큐어는 굉장히 중요한 소재이고, 근심거리다.
그건 여러 인물들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건 외피에 불과하다.
그건 직접적으로 '외피'에 작용하는 일종의 물리적 촉진제이긴 하다.
다만 엑스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된 테마를 확대하고, 심화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하 그 이유들을 가급적 짧게 설명한다.


1. 큐어는 왜 등장했는가?
큐어가 등장한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촉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촉진'의 의미를 좀 구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촉진은 내적 주제의 확대심화인가?
아니면 그저 '이야기 소품'의 하나인가?

불행하게도 큐어는 엑스맨3에서 이야기의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인물들에게 직접 작용하고, 또 그 인물들의 실존에 영향을 미친다고 우리는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속에선 그런 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실존의 변화, 혹은 존재조건의 심각한 위기상황은 '코미디'로 취급되거나(변신녀의 경우), 혹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배반당한다(매그니토의 경우). 그러니까 이건 진짜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가짜 이야기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게임장치의 '무기' 하나를 첨가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 실제적 의미는 그것 뿐인데, 온갖 인물들은 갖은 똥폼을 다 잡고, 그것이 실존적인 근심인 듯 고민하고, 말랑말랑한 휴머니즘적 잠언들을 설파한다(스톰의 그 계몽주의적인 뜨아한 -_-;; 대사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큐어는 게임이라는 엑스맨 3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의 종속 변수에 불과하다.
그건 일종의 촉진제이며, 그것이 촉진하는 것은 '게임의 쾌감'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인해 파생된 존재론적인 고민은 '농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매그니토의 체스장면).


2. 엑스맨, 인간 혹은 비인간, 그 질문들..

엑스맨은 어떻게, 왜 생겨났는가?
그것은 진화인가, 아니면 비인간적인 변이, 퇴보에 불과한가?

기존 엑스맨 1, 2편은 인간이란 존재의 진화 혹은 변이에 관한 흥미로운 철학적 텍스트였다.
그것이 만화적 상상력, 그리고 SF적 상상력의 세례를 받아서 블록버스터 엔터테인먼트로 가공되었을지라도 그 안에 담겨진 무거운 질문,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철학적 근본 질문까지는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걸 엑스맨 1, 2편이 다루는 방식은 물론 상업영화의 코드를 기본축으로 하면서, B급영화의 감수성을 차용하는 방식이었다. 썰렁한 농담들과 캐릭터들의 갈등, 그 미묘한 심리적 긴장의 경계들은 엑스맨 1, 2편을 보는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엑스맨3]에서 그 도전적인 질문들, 그 핵심적인 코드로서의 갈등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변화한다.
인간 vs 엑스맨의 구도, 그리고 엑스맨 vs 엑스맨의 구도라는 엑스맨의 기존의 양대 갈등구조는, [엑스맨 3]에 와서는, 인간 vs 엑스맨의 구도라는 거시 구도하에서, 인간의 대리인로서 착한 엑스맨 vs 나쁜 엑스맨이라는 '초딩' 수준 게임 구도로 변한다.

그런데 영화는 왜 착한 엑스맨이 착한지, 왜 나쁜 엑스맨은 악한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나는 누가 착한지, 누가 나쁜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서 그렇다는 식이다.

물론 여기서도 '가능성'의 존재, 갈등의 실체를 상징하는 존재가 있긴 있다.
그건 물론 착한 엑스맨과 나쁜 엑스맨의 갈등선을 극적으로 증폭시키는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닥터 진 그레이다.


3. 닥터 진 그레이 - 그런데 아쉽게도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다.
닥터 진 그레이는 [엑스맨 3]를 걸작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의 유일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만~!! 버라이어티 쇼쇼쇼의 유혹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게 제작자의 압박인지, 아니면 시나리오의 한계인지, 아니면 감독의 비전부재인지.. 난 모른다. 아무튼 [엑스맨 3] 최소한 [헐크]만큼의, 매력적인 '초인'에 관한 철학적 비전과 맞붙을 수 있을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문턱까지는 왔다. 그런데 그 문턱을 넘어서면서 SBS 버라이어티 철부지 연예인 게임쇼인 엑스맨으로 둔갑해버린다.


진 그레이의 죽음은 정말 코믹하다.
그녀는 싸구려 휴머니즘과 낭만주의에 의해 사살당한다.

그녀를 죽이는 건 착한 엑스맨이다.
 
그건 정말 아이러니하면서, 웃기지도 않은 엽기적 시츄에이숑이다.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영화적 비전 : ★★
* 대중 친화도 : ★★★1/2

* 비주얼 : ★★★1/2 (그냥 볼거리의 차원에서의 비주얼. 미장센 이런거 아니라)
* 내러티브 : ★★1/2



p.s.
이 글 제목는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그치고, 수소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를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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