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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픽스, 메멘토, 박하사탕과 돌이킬 수 없는 - 내내님과의 대화

2007. 11. 6. 01:25  |   프리뷰  |   키노씨
0. 이 글은 '돌이킬 수 없는'에 주신 내내님(내가 내냐)의 논평에 대한 답글입니다.
제 볼 것 없는 글에 이토록 풍성한 논평을 주신 내내님께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하 내내님께서 주신 논평은 회색박스로 처리합니다.


1. 트윈픽스의 빨간 방.

특히 저 포스터는 즉각적으로 트윈 픽스 마지막장면의 빨간 방을 연상케 했어요.

[트윈픽스]의 '커튼으로 가려진 빨간 방'과 [돌이킬 수 없는]의 지하도 이미지는 내내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유사하네요. [트윈픽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데이빗 린치의 작품입니다. 물론 영화판이 아닌 TV판으로 말이죠.

다만 [돌이킬 수 없는]의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지하도는 [트윈픽스]의 빨간 방보다는 좀더 날 것의 느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이미지 모두 몽환적이고, 욕망의 가려진 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돌이킬 수 없는]의 지하도가 좀더 현실에 가깝다면,  [트윈픽스]의 그것은 좀더 무의식, 몽환, 꿈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트윈픽스]에 등장하는 붉은 커튼으로 둘러싸인 방.
어떤 평론가는 백악관에 대한 메타포라고 해석하더라(정성일).



2. 내러티브의 시간 : 박하사탕, 메멘토와 비교

ㄱ. [메멘토] 경우

똑같이 과거를 거슬러가는 이야기구조이긴 하지만 메멘토는 그 과정에서 기억의 상실과 재구성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통한 진실의 왜곡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진실의 실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규정해야하는가란 문제를 미스테리적 재미를 곁들여 제시하고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인 주인공 레너드의 기억의 재구성이 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럭비공같은 불확실한 것이기에 메멘토의 반전퍼레이드는 설득력의 획득을 넘어서서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는 메리트를 확보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억지와 과장을 느끼게 하긴 커녕 다음엔 어떤 반전이 펼쳐질지 기대마저 하게 만듭니다.)


ㄴ. [박하사탕] 경우

박하사탕은 김영호란 인물의 과거로의 회귀과정을 따르면서도 한국사회가 현대화과정을 거치며 발전하는 동안 김영호개인(그는 시대의 발전이란 미명하에 희생된 그 시대 사람들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지지요.) 이 현재로 이동하며 잃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그려내며 마지막 장면과 첫 장면의 공간과 무대가 일치할 수 밖에 없는, 바꿔 말하자면 김영호의 한국현대사 참여의 시작과 마지막의 공간이 동일하다는 불가항력에 관한 수미쌍관법을 소설적으로 완벽히 선보였다면


ㄷ. [돌이킬 수 없는] 경우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배열했을 뿐인 [돌이킬 수 없는]을 보고 느낀 뒷담은 우습게도 "말이 씨가 되니 말조심을 해야되는구나..." 정도밖에는 없었습니다. (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도에서 뒹군다는 꿈과 벵상 카엘의 애널섹스욕구가 현실화되잖아요?)

굳이 찾자면 모니카 강간범이 아닌 엉뚱한 남자에게 복수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그건 그 뒤로 전개되는 플롯과 아무 관련이 없는 단순한 오해일 뿐이지요. 거기다 화면전환시 반복되는 카메라 빙빙돌리기는 짜증만 났구 결정적으로 모니카 벨루치의 외모와 명성에 비하면 너무 눈요기용으로 전락시킨 느낌이 들어서요. 이건 돌이킬 수 없는 뿐만 아니라 그녀가 출연한 모든 영화가 마찬가지였습니다.


[메멘토]와 [박하사탕]에 대해 주신 말씀은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돌이킬 수 없는]에 대해 실망감을 피력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좀 달리 판단하는데요. 제 관점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에서의 시간의 역순 구조는, 그런 내러티브 구조는 이 영화의 비전과 정확히 부합하는 '방법론'이었다고 판단하고, 또 충분히 영화적으로 설득력있게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도 말씀 드렸듯, 욕망이 원형적으로 순환하고, 회귀하며 또 그렇게 '모순'에 찬 상태로, 스스로가 죄를 만드는 형식으로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울한 묵시록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것이 정말 과감한 이미지들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고 판단해요.

그리고 '대상의 착오' 부분은, 매우 의미심장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복수가 실현되었을 때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정의의 성취,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설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관습적이고, 평면적인 '감상'을 전복시키는 시도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균열로 느껴지신다는 내내님의 말씀에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지만, 이와 함께 영화 전체가 갖는 묵시록적인 비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의미있는 에피소드이자 '사건'이라고 평가될 만한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복수, 인간의 정의가 갖는 한계랄까, 그 부질없음이랄까, 좀더 나아가면 '우연'을 통해 실현되지 못하는 복수, 혹은 정의가 실은 좀더 커다란 지배적인 구조, 숙명적인 조건에 대한 조소 혹은 유머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데리다가 시도했던 '전체''의미'의 이성적인 구조에 대한 해체랄까, 전복적인 시도랄까 그런 것이 느껴졌어요.


3. 라스트

그러나 자칫 3류외설물로 전락할지도 모르던 영화가 간신히 바닥치기를 모면한 것은 마지막 장면덕이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이 흐르면서 보여지는 모니카의 행복한 모습은 일반적으로 구사되는 "행복하게 시작했지만 결말은 비극적이다." 내지는 그 반대구조의 일반적 내러티브형식이 아니라 처참한 비극으로 결말지어지는 시작을 먼저 제시한뒤 과거로의 복기장면나열을 통해 마지막에 보여지는 이야기의 첫머리는 결론의 암시나 상징이 아니라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닌)스타트`였다. 라는, (써놓고보니 웃기는 단어군요.) 어찌보면 간단한 뒤집기이지만 기발한 착상의 영화문법의 하나였습니다.

박하사탕의 경우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김영호의 아픈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이 들어가있는 반면 돌이킬 수 없는 의 마지막은 완벽한 해피스타트이죠. (배경에 깔리는 비장한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유심히 들으면 완벽한 해피라고하기엔 좀 무리가 있기도 합니다.) 이 형식적 일탈행위의 시도로 인해 얻어진 효과는 아니러니하게 영화를 다 본후 행복하게 끝난 기분좋은 영화 한 편을 보는 착각까지 느꼈다는 겁니다. 그 주역이 모니카 벨루치라는 극강의 미모의 소유자였기에 착각의 농도가 더욱 더 짙어질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런 미인이 상상조차 못할 극한의 상황에 내팽겨치는 것에 절대 익숙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태아포스터를 깔아놓은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지만 이런 유형의 영화엔 전혀 어울리지 않더군요.

저로선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감상은 오히려 공포, 소외, 부질없음, 고립감, 이런 영원한 고통과 모순들의 영겁회귀... 이런 이미지들을 극적으로 증폭시키더군요. 그래서 그 끔찍함, 그 허망함이 아주 극명하게 고조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졌구요. 그 '역설적인' 해피엔딩의 방식이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는 '블랙 유머'로 처리되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에서는 좀더 노골적인 대조를 통해서 형상화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제 감상과 판단이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일단 이것으로 제 대답을 갈음할까 싶습니다.
다시금 풍성하고, 깊이있는 논평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오아시스]에 주신 논평에 대해서도 조만간 대답을 드릴까 싶네요.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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