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21

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잔인한 우리시대의 캔디 - 미녀는 괴로워 (2006)

2007. 2. 4. 20:59  |   프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스포일러와 (전혀) 상관 없습니다.

0. 속물 영화의 위대함

[미 녀는 괴로워](이하 '미괴')는 속물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그 속물근성이 어떻게 현실과 화해할 수 있는지, 혹은 그 현실을 속일 수 있는지를 그린 영화다. 그 속물에 나도 포함되고, 당신도 포함된다. 물론 이슬 먹고 구름똥 싸는 '거룩한 분'들은 예외다. 이 영화는 대박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방귀 좀 뀐다는 관객들, 지적 속물근성에 쩔어버린 평론가들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하면서 이 영화를 폄하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지 안그런지는 난 리뷰를 살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런데 이 영화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정말 심각한 영화다(정말이다, 나 진지하다. ㅡ..ㅡ; ). 이 영화가 심각한 이유는, 우리시대의 속물근성에 대한 가장 교활하고, (그런 의미에서)현명한 판타지이면서, 또 우리시대의 문화가 표현하고, 수용할 수 있는 그 감수성의 표준과 한계를 제시하는 영화라서 그렇다.


문화(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괴물]이나 [가족의 탄생], [천하장사 마돈나]가 중요한 영화인 것만큼, '미괴'는 중요한 영화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혹은 대박터진 이유)를 생각나는대로 써본다. 이 영화가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대박이 터져서이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녀는 괴로워 (2006)
                                    120 분  |  개봉 2006.12.14

                                감독 김용화, 각본 김용화, 노혜영, 원작 스즈키 유미코 Yumiko Suzuki







[미녀는 괴로워]의 흥행코드에 대한 단상

 - 잔인한 우리시대의 캔디







1. 세속과 고결 사이, 물질과 정신 사이, 촌스러움과 세련됨 사이

'미괴'의 감수성은 전반적으로 '과잉'이다. 과잉 정서, 그 감수성은 이미 익숙히 반복된 과잉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과잉정서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상징하는 건 TV 연예프로그램들(이를테면 'X맨'이나 '여걸6', 혹은 '놀러와'나, '일밤'류의 허접한 -_-;)이다. 이런 유치한 소꼽장난 프로그램들에 가학적 정서가 포개진다. 그 가학심리를 조장하고, 유도하는 건 포털의 연예관련 뉴스들이다. 포털은 죽음마저도 이용한다. 물론 근엄하신 언론들도 방구나 뽕이나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시대의 감수성은 과잉정서과 가학심리가 교배된 아주 살벌하고, 비인간적인 감수성이다. 그 과잉의 가학심리는 '비교'를 강요한다. 그리고 흔히 그 비교의 감정은 차별적 상품의 소비(명품족)와 누가 누가 잘났나, 누가 누가 돈 많이 버나, 누가 누가 이쁜가를 통해 표출된다.


여기에 '미괴'는 그런 살벌한 정서를 바탕으로 '꿈꾸는 캔디'를 등장시키는데, 그 캔디는 참 못생긴 캔디다. 그러니까 당신, 혹은 우리들(확률적으로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많고, 잘생기고 이쁜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우리는 그 캔디를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때론 참 단순하다.


'미괴'는 그 살벌끔찍한 정서들을 충분히 '전형화'시켜서 표현하고 있다. 캔디가 있으니까 당연히 이사벨라 (X) 이라이자(O)도 있고, 당연히 테리우스(혹은 안소니)도 있다. 그러니까 '미괴'에서 우리가 무슨 예술적인 비전이나, 정치적인 비전을 바라는 건 말도 안되고, 우리가 기대하는 건 이 세속적이고, 가학적이며, 잔인한 현실을 어떻게 저 캔디가 통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호기심이다. 우리는 이미 캔디니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한편으론 성형수술이라는 테크놀로지(^ ^ ;; )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캔디의 진심이다. 그건 기술과 마음 사이, 물질과 정신 사이, 세속과 고결 사이에 있다.


'미괴'는 한없이 촌스런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는, 혹은 거기에 있기를 기대하는, 세속 세계의 살벌한 마음 속에 있는 순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포장함으로써, 그 양자의 구도를 역전시킨다. 이제 촌스러운 것이 세련된 것과 섞이고, 고결한 것이 세속적인 천박함에 용서를 구하며, 마음이 물질에게 위로를 전한다.

쉽게 말해서, '미괴'는 우리가 우리 안에 내재된 세속적 감수성의 잔인함을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그 한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긴 하지만, 그것을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촌스러운 형식으로 보여주는 대신에, 낭만적인 판타지로 촌스럽지 않을만큼 새련되게 채색해서 보여준다. 그건 충분히 현실적인 판타지이긴 하지만, 그게 판타지라는 건 변함이 없다.


결론은?
우리는 미녀를 좋아한다.
단, 그 미녀는 착해야한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속물이다.



2. 사족 하나 - 김아중

김아중 훌륭하다.
그 연기가 훌륭한 건, 물론 아니고, 그 가창력이 훌륭하다.
난 김아중 별로 이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 보니 역시 별로 이쁘지 않다. ㅎ
그런데 이 영화 보고나니까 귀엽다.



3. 사족 둘 - Maria

'Maria'의 달콤하고, 매혹적인 카타르시스가 없었다고 해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성공했을까?

솔직히 'Maria'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것 같다.
어떤 평론가들은 '영화음악'이란 '(본질적으로) 이미지 매체'인 영화의 잔기술, 반칙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뭐, 종합예술인 영화에서 '음악' '사운드'를 별도로 분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미괴'에서 'Maria'는 위 '1'에서 말한 그 심리적 갈등과 불안과 긴장과 모순을 일시에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아중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관객들은 이 '사운드'가 폭발하면서, 그 갈등과 불안과 묘한 이중적 긴장과 모순에서 해방된다. 이 카타르시스는 본질적인 해방은 아니지만(그러니 극장 밖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지만 ^ ^ ; ) 엄청난 쾌감이긴 하다. 


참고로 난 이 음악 샀다. - - ;;



4. 사족 셋 - 상업영화의 가능성과 위험

성형(혹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비정한 이면)이라는 이슈는 이미 지겨울 만큼 익숙한 소재이긴 하지만, 이걸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이제까지 없었다. 그러니 '미괴'는 사회/문화적으로 익숙한, 혹은 고민될만한 가치가 있는 화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공로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충분히 재밌게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그 재미의 이면에 있는 어떤 불편함, 어떤 현실과의 괴리, 혹은 재현된 현실의 모순에 대해 근심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영화적 메시지, 혹은 영화를 통한 의제 설정은 그 의제가 관극 후에 충분히 '이성적으로' 고민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즉 그저 '수동적으로' 영화의 이미지를 쫓아서 탐닉했을 뿐인데도, 그 주제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관극'을 통해 고민했다는 착각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떤 고민할 만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혹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유토록 하는 힘은 '상업영화'가 갖는 긍정적인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영화가 제시하는 '공론화'에 대한 가능성은 영화 자체의 몫이 라기 보다는 관객의 몫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렇듯, 영화 텍스트를 완성시키는 건 적극적인 '관객의 해석'이다.


트뤼포의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다시 보고, 글로 쓰자(영화를 만들지는 못해도 말이지).


 

5. 끝으로 별점 (별점 이거 싫어했었는데, 장점도 많은 거 같아서).

총점 : ★★★★ (5개 만점)

영화적 비전 : ★★★
대중친화적 코드 : ★★★★★
비주얼 : ★★★1/2
내러티브 : ★★★1/2

좋은 잔상 : 무대의 비주얼, 김아중의 보컬.
나쁜 잔상 : 중간 중간 과도하게 전형화된 과잉감정, 과잉캐릭터. 엑스트라(의 오버액션).


누군가가 작품성과 대중성을 나눠서 재단할 수 있는가? 이거 무식한 짓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솔직히 그런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 발언의 취지는 긍정하는 바이지만, 관습화된 관극 태도, 그 수용적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편의상) 분리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차피 내 만족으로 쓰는 글이기도 하지만, 읽는 사람을 위해서도 쓰는 글인 바에야 뭐, 이런 유치한 별점도 (읽는 사람에게) 유용하면 그만이지 뭐.


별점은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별점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