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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비극적 영웅 잭 바우어, [24] 시즌 6 최종회 단상

2007. 6. 28. 09:36  |   리뷰  |   키노씨
#. 스포일러의 불안을 (가급적) 고려합니다.



1. 잭 바우어, 햄릿과 오이디푸스왕 사이

잭 바우어는 점점 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신화 속의 캐릭터를 닮아가고 있다. 잭 바우어는 오이디푸스왕과 햄릿의 운명을 한 몸에 지닌 듯, 그렇게 절규하고, 또 마지막엔 늘 그렇듯, 불안과 분노와 슬픔에 휩싸인 채로 침묵한다.

TV 드라마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정치 액션 첩보 [24]는 잭 바우어라는 걸출한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그는 정말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든 고통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그것을 결국은 극복한다. 무엇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해 잭 바우어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캐릭터의 운명 같은 것에 불과하다.

잭은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 실존적 내면에 대한 놀랄만한 형상화,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역동적인 현실감 때문에 그 어떤 현존보다 더 현존하는 인물 같다. 그는 가장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캐릭터다. 잭의 이미지-액션이 드라마 내러티브의 외피로서 비현실성을 부여한다면, 그 이미지-액션을 만들어내는 인물 내면, 그 갈등적 드라마에 의해 분노하고, 또 싸우는 실존은 내적 표상으로의 현실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잭 바우어는,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캐릭터이며, 그 잭이라는 캐릭터의 표상은 상업 드라마의 관습적인 이야기구조와 때론 긴장하고, 때론 그 관습을 극적으로 초월함으로써 불멸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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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 드라마로서의 [24] - 두 개의 위협 

[24]의 놀라운 점은 액션의 스피드가 아니라, 액션에 내재된 내러티브의 스피드다.
그리고 그 속도는 액션을 만들어내는 외부의 위협과 그 위협들과 관계 맺는 내부의 위협(배신), 양 날개를 달고 질주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세계 유일 수퍼파워로서의 미국는 희미해진 채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이는 의도적이다. 미국은 공격 당하고,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것은 외부와 더불어 내부에서 온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24]는 다소간 보수적인 안보관(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

정치 드라마로서의 [24]의 탁월함은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이라는 수퍼파워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장(엄살)에 기반하면서도, 그 이야기의 과장을 놀랄만큼 입체적인 캐릭터와 구성(플롯)으로 극복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갈등과 불안과 배신의 드라마를 구현하는 각 캐릭터의 생명력이다. 특히 탐 레녹스(Peter MacNicol)는 잭 바우어와 비견할 만한 [24]의 가장 걸출한 캐릭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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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죽음, 그리고 여행 - [아이다호] 단상

2007. 6. 20. 04:03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생각하는 나에게 무수히 많은 풍경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오는 것은 아이다호.
아이다호.
그렇다.
나는 아이다호를 떠올린다.

구스 반 산트가 만든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1991 >를 본다는 것은 꿈꾸는 일이란 얼마나 슬픈 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이 얼마나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도록 하는 것인가를 가슴아프게 바라보는 일이다. 소망은 흔하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현실에 의해 배반당한다. 그렇지만 그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살수 없다.

나는 리버 피닉스가 연기한, 매춘으로 간간이 생계를 이어가는 소외된 청년의 소망을 쫓아간다. 이 글은 리버 피닉스에 보내는 일종의 연애편지이며, <아이다호>의 형편없는 게이 청년의 애인이 되어, 그의 소망을 함께 꿈꾸며, 그의 죽음을 온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는 조사(弔詞)다. 그리고 이 조사는 그의 소망을 지금, 여기서 다시금 꿈꾸는 것, 그 소망을 향한 여행에 다름 아니다.    

영화 속에서 리버는 자신을 도로 감식가라고 말했다.
길을 맛보는 사람.
그 길을 느끼고,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그에게 갑작스런 졸음이 쏟아진다.
그리고 쓰러져서 꿈꾸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 그건 어쩌면 꿈꾸는 것”이라는 노래가사처럼, 그는 현실에는 죽었지만, 지상에서 체험하지 못한 소망을 영원히 꿈꾸고 있는 것이며, 내가 아직은 갈 수 없는 길들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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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 못한, 그리고 아마도 죽는 날까지 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아이다호로 향하는 수없이 길게 이어진 길, 그 현기증 나는 길들이 몰려든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고, 그리고 마치 리버의 괴상한 병에라도 걸린 듯이, 나는 쓰러져서 꿈꾼다.   

내게 여행이라는 이미지는 언제나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의 경계에 존재한다.
여행은 마치 탄생에 대한 메타포 같다. 탄생은 한없이 평온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이제는 자궁이라는 심연에서 떠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세상, 고요와 평온의 세상에서 추방되어 , 그 기억만을 영원히 추억하며, 그리고 소망하며, 너무도 두렵고, 낯선 세상에 스스로를 던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삶을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여행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면, 삶은 다시, 꿈꾸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자궁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잠깐, 우리는 꿈꾸는 것이다.

영화에서 리버는 기면발작증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쓰러져서 잔다.
그렇게 쓰러져서 잠자는 리버에게는 유년의 풍경이 찾아온다.
이상한 풍경들.
파스텔화처럼 뿌옇게 흩어져서, 흔들리는 풍경 속에 어린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가 있다.
그들이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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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버에게는 그 꿈이 찾아오는 것일까.
유년은, 현실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있는 풍경이다. 반대로 자궁의 완전한 세상과 가장 가까운 시간이면서, 세상이라는 혼란과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되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리버에게는 항상 유년의 풍경이 꿈으로 찾아온다.

리버는 남창이다. 그는 매춘을 통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는 그런데 자신과 함께 거리 생활을 하는 한심한 청년(키에누 리브즈)을 사랑하고 있다.

그 청년과 모닥불에 앉아서, 리버는 말한다.

“널 사랑해”.

그리고 리버는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한다.

키에누가 답한다.

“노말 패밀리? 그게 뭐야?”.

 
리버는 키에누의 품에서 잠든다.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소망은 항상 떨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숨막히는 설레임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살아서 별별 더러운 꼴을 다 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삶이니까”. 리버는 자신의 소망, 노말 패밀리의 꿈이 망가지고,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꿈꾸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리버가 꿈꾸고 있는 것. 그것은 [노말 패밀리]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망이야?" 라고 비웃는다면, 나는 그렇게 비웃는 자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구도 소망을 비웃을 자격은 없으니까. 그 소망이 당신을, 그리고 나를, 그러므로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은, 리버가 거리에 쓰러져 잠자고 있는 동안에 찾아오는 유년의 꿈처럼, 나에게 역시 희미하고 뿌옇게 가려져 있다. 나는 지금 그것을 분명하게 그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풍경이 있는 어딘가를 향해 여행하는 것, 그것이 내가 죽음에 닿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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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햇빛, 세속과 구원 - [밀양] 단상

2007. 6. 19. 03:25  |   프리뷰  |   키노씨
#. 스포일러 (전혀) 없습니다.

1. 세속세계의 구원


밀양은 세속적 차원에서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그 구원은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오고,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다시 버려지며, 하지만 비밀의 햇빛처럼 당신의 주변에 있다. 송강호가 그 "비밀의 햇빛"일까? 나는 그렇게 봤지만, 그게 정답은 아닐테다. 영화는 퀴즈가 아니며, 어떤 정답도 없고, 모두가 정답이긴 하다.


2. 함께 보면 좋은 영화들 : [브레이킹 더 웨이브](라스 폰 트리에)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길](펠데리코 펠리니) [십계](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가장 가까운 영화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다.
[친절한 금자씨]는 마치 [밀양]의 동전의 뒷면 같은 영화다.
[길]은 송강호를 위한 선택이며,
[십계]는 화면 그 너머에 있는 숨겨진 인과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밀양]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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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은 오아시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오아시스의 주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세속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






3. 전도연의 연기에 대해

'구라 피아노'를 빼고는 정말 훌륭하다(이 장면은 정말 옥에 티).
영화는 의도적으로 인공적인 조명을 피하고 있다.
자연광 속에서 전도연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드러난다.
그 얼굴은 초췌하고, 윤기없는 표정들로 일그러진다.
이건 여배우로서 용기라면 용기다.

전도연의 연기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에밀리 왓슨을 떠올리는데...
두 여배우의 연기는 모두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론 에밀리 왓슨의 연기에 반표 더 주고 싶다.
물론 연기자가 올림픽 선수들은 아니니만. : )


4. 송강호, 비밀스런 햇빛

그는 고치는 자이며, 숨겨진 자이다.
우리의 비루한 일상에 숨어 있는 구원의 이미지.
어떤 고결과 신성도 없는 인간 모습을 한 구원.
무식하고, 천박하지만.

이 지점에서 [밀양]은 [오아시스]와 정확히 겹친다.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영화적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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