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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의 리얼리티 : 일상과 기적, 그리고 구원 - [오아시스](2002)

2007. 10. 23. 00:01  |   프리뷰  |   키노씨
#.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을 최소한으로 추고합니다.


0. [오아시스]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이미지는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이 영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나-당신에게 말거는 방식은 자신을 보아달라는 투정이 아니다. [오아시스]는 스스로가 마치 세계인 것처럼 스스로의 진실에 매달린다. 좀더 정확하게 학대받는 주인공들-그러므로 나이자 당신, 어쩌면 우리의 현실적/심리적 상처들에게 매달린다. 그것은 세상의 관점에 보면 편협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편애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게 우리의 상처받은 세상이며, 당신이며, 나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애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 [오아시스]에 있는 세계는 두 개의 차원으로 나뉜다. 영화의 상징적인 첫 장면, 즉 오아시스가 그려진 양탄자 그림, 그건 꿈의 세계이며, 소망의 세계이다. 그리고 현실인 영화 [오아시스]가 있다.  그래서 영화는 그 양탄자가 의미하는 꿈으로서의 소망으로서의 세계와 오아시스 바깥의 세계가 서로 다른 구별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두 개의 세계는 서로를 부정하는 세계가 아니며(이 점에서 [시네마 천국]과 구별된다), 하나의 세계는 다른 세계의 좀더 낮은 단계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의 세계는 우리가 항상 소망해야 하는 차원의 세계이다.

2. [오아시스]에서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아주 느리며, 아주 숨막힐 정도로 갑갑하다. 그런데 그 느리고 진부한 속도가 믿겨 지지 않을 만큼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도약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전이의 감정, 우리의 정서가 어떤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는 그 순간의 ‘감동’은, 그래서 극적으로 증폭한다. 그 순간을 통해서 [오아시스]는 나-당신과 세상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구조화시켜 보여 준다.

[오아시스]는 부유하는 이미지의 속도를 정지시키고, 그 이미지 속을 흐르는 내러티브를 원형화시켜 정서/심리/반응을 한없는 정지의 상태로 가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정서의 의식적인 가둠, 그 '댐'을 (보통의 영화라면 터뜨려 버리고 그 질주를 시작할 터인데) 가만히 가만히 스스로 허물어지도록 놓아줌으로써 비현실의 리얼리티라고 부를만한 차원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거짓이며, 얼마나 기만인지를 가짜 이미지의 세계가 보여주는 진짜 이미지 속에서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아시스]가 나-당신에게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며, [오아시스]가 구성한 풍경이 나-당신의 내면의 풍경에 옮겨와서, 이미 있었던 나무와 강물을, '그게 아니야'라고 나즈막히 속삭이며 어느 순간 바꿔버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진실의 손짓이며,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호소이며, 한 깨달음이다.

그렇게 닿은 진실의 강은 아주 아주 오랜동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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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Oasis, 이창동. 2002)     
한국  /  드라마  /  132 분  /  개봉 2002.08.15

설경구     :  홍종두 역
문소리     :  한공주 역
안내상     :  홍종일 역
류승완     :  홍종세 역
손병호     :  한상식 역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비전 : ★★★★★
* 대중 친화도 : ★★★1/2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 연기 : ★★★★★
* 장면 : 경찰서 이후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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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정치, 그리고 상징적 절망 - [돌이킬 수 없는] (2002)

2007. 10. 22. 12:04  |   프리뷰  |   키노씨
#. 스포일러 없습니다. 예전 글 추고한 글입니다.


0. 욕망의 문제를 영화와의 관계 속에서 질문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나에게 영화를 달라. 그러면 세계를 공산화시키겠다.”라고 레닌은 말한다. 그와는 정반대의 정치적 함의로서 푸코는 “보수반동의 기억장치”라고 말한다. 지식과 권력과 그리고 그 매개로서의 영화. 그 함정은 단순하다.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욕망이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노골적으로, 아주 대담하게 우리의 욕망을 붙잡는다. 그것은 미술이 그렇듯이 시각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으로 접근한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이미지-액션 그 자체의 시각적 쾌감을 통해 우리의 감각들과 직접적으로 만난다. 우리는 그 선택을 피할 수 없다.


0-1.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의 회로들과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욕망은 서로 겹쳐지고, 어긋나고, 다시 만난다. 그것은 능동태인가, 수동태인가. 우리는 영화를 능동태로서 만날 수 있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수동태로서, 그 이미지-액션에 대해서 거절을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기술적 방식, 이를테면 롱-테이크은 그 희미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긴 하다. 이미지-액션이 재현되는 리듬과 속도의 조율을 통하여 어쩌면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그 모든 이미지-액션의 폭주가 끝난 뒤에 남은 정지한, 희미하게 흐르는 잔상들이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그 쾌락을 통해 우리가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마비되는 자의식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그 시각적 쾌락의 폭주가 끝난 뒤의 여운을 그저 흘려보내고, 자신의 내부에 머물게만 하는 상자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다시금 사고하고, 반추한다. 그 대화를 통해 영화는 새로운 정치적 담론의 세계로 나아가고, 세계를 분석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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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 가스파 노에, 2002)      
프랑스 / 비유적인 역사극 /  95 분  /  개봉 2003.04.04
        
모니카 벨루치(알렉스)
뱅상 카셀(마르쿠스)
알베르 뒤퐁텔(피에르)
필립 나혼(필립)



1. 나는 여기서 큐브릭의 영화들과 만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은 큐브릭의 비전을 좀더 과감하게 밀고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가를 지금 확정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대담한 비전을 보여주며, 영화가 제시할 수 있는 철학과 정치와 욕망의 문제를 그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논쟁의 한복판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아이즈 와이드 셧]이 거장의 깊은 완숙함에서 우러나는 음울한 관조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은 논쟁적이며, 파괴적인 에너지로 가득찬 청년의 패기어린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뜬금 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조금은 민망하게 거대한 진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  [돌이킬 수 없는]은 의식의 봉합 없는 재현을, 탄생과 죽음과 욕망의 끝없는 순환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장면들은 하나의 거대한 원처럼 끊김 없이 흘러간다. 그것을 표현해내기 위해 이 영화는 다소 유치한 잔기술을 쓰고 있지만, 그 잔기술이 그저 단순한 잔기술이 아니라, 의식과 욕망과 정서와 정치와 순환의 재현을 위해서, 그것이 하나의 완전한 원형과 구(球)의 체현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흔들리며 이어지는 롱 테이크는 어느 순간 어둠 속으로 흘러가고, 그리고 다시 과거의 기억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이 종착하는 지점은 환한 빛의 순간들이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이며, 우리의 탄생이라는 선험적 세계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세계는 절망적인 묵시록의 세계이며, 모든 것이 시간의 원 속에서 파괴와 종말을 영원토록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이 보여주는 반복되는 자본주의 메카니즘의 완고함과 그 안에서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권력과 지식과 욕망의 문제를 우울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은 그 파괴의 순환을 격정적으로 소리치고 있다. 하지만 그 둘 모두의 절망은 상징적인 절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그 상징적인 절망의 이미지를 통해 현실의 절망을 깨뜨릴 수 있는 무기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비전 : ★★★★★
* 대중 친화도 : ★★★1/2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 장면 :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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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의 사춘기, [열혈남아](1987)

2007. 10. 22. 00:01  |   영화/드라마 단상  |   키노씨
#.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그냥 단상입니다. 이 글은 아주 예전에 썼던 글을 추고한 글입니다.


1. 영화에 대한 사랑을 정신적인 성숙의 단계에 비유한다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짝사랑처럼 그렇게 온통 마음이 빼앗기는 순간들을 만났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 시절의 영화는 [열혈남아]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춘기의 짝사랑이다. 불가피한 사랑의 이미지들, 감정이 흘러가는 속도와 그 시간들, 그리고 엇갈림의 풍경들이 [열혈남아]에 있다. 그리고 가슴 저미게 슬픈 왕걸의 노래가 흐른다. 그러면 나는 정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들, 특히 [열혈남아]을 본다는 것은 한없이 떨리는 사춘기의 소녀로 돌아가 지나가 버린 시간들, 내가 담겨져 흘러왔던 그 그립고 슬픈, 따스하고 시린 시간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이다. 그것은 내 가느다란 감수성의 실에 매달린 까마득한 하늘 위를 날고 있는 하나의 연처럼 이리 저리 흔들린다. 그리고 이미지가 감정의 속도를 재현하는 그 스크린 속으로 나는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황홀한 이미지들의 폭포들에 휩쓸리며, 한없이 안타까워하고, 한없이 눈물 흘린다.

2. [열혈남아]가 갖는 특별함은 시간과 이미지의 일치와 엇갈림에 있다. 그 이미지의 흐름과 단절의 속도가 인물들의 정서들 통해 조율되고, 그 조율을 통해 구성되는 정서적인 풍경들은 놀랄 만큼 신비로운 매력으로 우리 안에 스며든다.

[열혈남아]는 인물들이 영화 속의 세계에서 갖는 정서의 움직임이 어떻게 흐르며, 어떻게 정지하며, 어떻게 다시 움직이는가에 대한 심리적인 그래프처럼 보인다. 마치 정확한 반응수치를 기록하기 위해 알 수 없는 센서들이 인물들의 심장에 부착된 것처럼, 그렇게 화면은 그들의 심장박동을 따라 멈추고, 흐르고, 질주한다. 그런데 그것은 도식적인 수치들의 조합이 아니라, 이야기이며, 열정이며, 예측할 수 없는 감정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만옥의 눈물과 유덕화의 분노에 찬 눈동자들 속으로 우리들의 진심으로 보내며, 그들을 우리의 마음속에 담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희망을 갖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한없이 꿈꾸는 우리들의 모습 그 자체이니까.


3. 홍콩반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직면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홍콩영화의 영화사적 특수함의 자장권에서 [열혈남아]도 어느 정도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혈남아]가 보여주는 특별함은 그 역사적 함의로만 영화의 의미를 환원할 수 없는 어떤 보편적인 감수성의 한 풍경을 재현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정서로 스며들어,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다시금 되돌려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얻는 결론은 어떤 순간들, 어떤 과정들, 어떤 열정의 떨리는 풍경들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과 그것은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열혈남아]는 그 외피의 내러티브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절망이며, 좌절이며, 슬픔이지만, 그 속살의 이미지들은 희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따스한 동감과 구원의 약속을 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혈남아 (熱血男兒, 旺角下問: As Tears Go By, 왕가위, 1987)      
홍콩 /  드라마, 범죄  / 90 분  / 개봉 1989.10.04

류더화     :  소화 역
장만옥     :  아화 역
장학우     :  창파 역
만자량     :  토니 역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 연기 : ★★★★★
* 음악 : ★★★★★
* 효과 : ★★★★★
* 장면 : 모든 장면들.

* 사운드트랙
忘了汝忘了我 (망료여망료아) : 당신을 잊고 나를 잊고 - 왕걸
是我胸口永遠的痛 (니시아흉구영원적통) : (당신은) 내 가슴 영원한 고통 - 왕걸 & 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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