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21

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포르노와 페미니즘 [PP 연재 4]

2007. 3. 19. 17:17  |   포르노프로젝트  |   키노씨


사용자 삽입 이미지

▲ Kali-Bobbitt, by Mary Beth Edelson


 


포르노와 페미니즘
- 유사 페미니즘과 포르노 증오의 문제




Ⅰ.
나는 페미니스트다.
포르노 쓰는 놈이 무슨 페미니스트?
그럼 나는 마초다.

그런데 실은 난 마초도,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그냥 모순에 가득 찬 인간이고,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진술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본주의의 포로이며, 그 한 가운데서 어떤 막연한 환상과 억압과 불만을 느끼는 불안한 영혼일 뿐이다.

이분법은 때론 명쾌하다.
하지만 흔히 아무런 생산적인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기엔 서로의 살을 부빌수 없는 깊은 간극과 심연만이 존재한다.

당신의 확신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당신이 진술하는 확정적인 언술들은 나를 묶고,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그게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최소한 당신이 증오하는 포르노만큼 나쁘다.

Ⅱ. 페미니즘이란?
(페미니즘에 대해 상식적인 이해를 가진 독자들은 생략하셔도 무방합니다).  

'정의' '의의'는 실은 기본이 아니라, 처음이자 마지막에 가깝다. 그건 가장 어려운 건데, 그게 가장 '쉽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은 제발 백과사전이라도 찾아보자. 당신의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식보다는 좀더 풍성할 확률 높다.

- 참조 : 이 단락은 키워드로도 입력합니다. 해당글 클릭하시면 됩니다. 본문에서는 요약글로 담습니다.


 

Ⅲ. 페미니즘의 다양한 분파들, 그리고 이론을 위한 이론들.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페미니즘은 '공식적인' 페미니즘 흐름일 뿐이다. 혹 다수설로서 많은 학자들에게 공인된 페미니즘 '개요'일 뿐이다. '여기'의 페미니즘이 '저기'의 페미니즘은 아니고, '어제'의 페미니즘이 '오늘'의 페미니즘은 아니다. 그리고 위 각 시대를 지배하는 주된 뿌리로서의 페미니즘의 흐름들, 그 뿌리와 가지에서 파생한 수많은 분파들은 서로 대결하고, 서로 투쟁하고, 극단적으로 서로를 배격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분파들 중에서 그 소수는 포르노가 지니는 '권위적 질서'에 대한 저항적 에너지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니 항상 페미니즘 진영에서 '무조건'에 가깝게 포르노를 '반대'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일종의 착각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다양한 분파 즉, 급진적 페미니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맑스적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조한혜정처럼)이 여러가지 경우의 수로 여기에 '교배'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는 좀더 복잡해지고, '따분해진다'.
따분해진다, 이게 문제다.

따분해지는 순간을 좀더 상술하면 이렇다.
페미니즘은 이론을 위한 이론, 지적인 '과시' 혹은 학자들과 그들의 몇몇 '제자'들을 위한 '지적유희' 수준으로 전락한다(조혜정이 '탈식민지 지식인의 책읽기'에 담은 문제의식은 여전히 의미있다). 페미니즘은 강단에서 멈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박사 되기 위한, 혹은 여성단체 연구원 되기 위한, 것도 아니면 그래도 폼잡기 위한 -_-; 수단으로 추락한다. 난 정말 그렇게, 아주 거칠게, 추론하고, 또 흔히 감촉한다.

페미니즘의 '실천적' 액션들을 '목격'한 독자들이 있다면, 그 목격담을 이야기해주기 바란다. 난 정말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그게 지적인 과시가 아니라, 삶에 스며들고, 일상을 파고들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경우를 목격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런 '이론과 실제의 완전한 만남'을 체현하고 있는 독자들의 '일기'를 나는 듣고 싶다. 제발 나의 '무식'과 감상적 재단을, 그 성급한 마초적 감수성을 야단쳐주기를 바란다.


Ⅳ. 유사 페미니즘 ; 혹은 장식적, 과시적 페미니즘, 또는 악세사리 페미니즘.  

시각, 2006년 9월 8일 오후 6시 21분.
장소, 대한민국 서울의 어떤 옥탑방 책상 위 창백한 모니터 속.

현재 스코어를 나는 거칠게 '상상적으로'('상식적' 아님) 추론한다.
페미니즘은 흔히 '과시적' 악세사리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천박한 비교 감정과 과시욕을 '실천적으로' 학습 시키는 '싸이월드'류의 문화에 포위되어 있다. 페미니즘이 삶에 있어서 뚜렷한 동기와 실천적인 에너지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건 그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막연한 뿌듯함을, 과시적 감수성으로의 만족감을 우리에게 줄 뿐이다.

페미니즘은 자신의 감정적인 공격 성향을 '교양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기술'로 흔히 활용
된다. 즉, 내 추론에 의하면, 과시적으로 '여성'이라는 '상품'을 근사하게 포장한 '유사' 페미니스트들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페미니즘 그 자체가 이제 상품으로서의 여성을 치장하는 화장술이 되는 경우 그건 '유사 페미니즘'이다. 이 놀라운 시대에 그 유사 페미니스트들은 자기 욕망이 어떻게 조직되고, 유통되는지를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자부심 만빵 충천하고 나서 포르노를 비난한다.

나는 현재의 성문화, 성의식은 이율배반의 극단적인 구조화
라고 생각한다. 이론 따로, 실천 따로다('포르노가 이론이라면, 강간은 실천이다'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그 '주장'과 '가설'이 어떤 문맥에서 나왔는지부터 살펴야할 것이다. 이 문제는 후술). 남/녀 대결적 구도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노골적인 상업적 이슈 '된장녀'논란이 난 정말 짜증난다. 그 한가운데 '유사 페미니즘'의 감정적인 뽀얀 갑옷 입은 무사들이 있다. 그들 역시, 나처럼, 자본주의의 포로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방신기'에 열광하는 소녀들처럼, '페미니즘'에 열광한다. 그리고 '섹스&시티'의 풍경을 그리거나, '무슨 무슨 학술잡지'를 인용하는 거다.

그런데 난 정말 그들을 모르겠다. 그들의 교양미 철철 넘치는 '남 나라 이야기'들을 나는 모르겠다. 그들이 즐겨 가는 무슨 무슨 세미나에서 나오는 그 머리 아픈 이야기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에 스며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철없는 유사 페미니즘의 과시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태들 언술들. 그것들 모두 이 아비규환에 가까운 모순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락녀들이 짭새보다 더 질색하는게 여성단체 사람이라는 걸 들은 바 있"
다고, "본질적으로 그 자칭 페미들은 남성우월주의자들이랑 별다른게 없다"고 누군가(박형준군)가 나에게 진술한다.

겉멋든 유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페미니즘의 그 종이 몇장 지식이 마치 스타벅스 커피로 상징되는 동경으로서의 라이프 스타일 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상품성을 치장하거나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위로해주는 일종의 자위용 도구.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포르노와 쌤쌤이다.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 남 이야기들의 조합으로 말하는, 어떤 유사 페미니스트들을 나는 안쓰럽게 바라본다. 그는 자기 욕망을 '타인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건 욕망을 흉내내는 방식이지, 자기 욕망을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은 아니다. 거기에는 선택이 없고, 그저 수동적인 학습만 있다.

문화적 차이로서의 남/녀의 구별
은 난 의미있고, 재미있고, 그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측면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획일적인 강요가 되고, 거절할 수 없는 도그마가 되면, 그건 억압이다.

페미니즘이 흔히 말하는 대로,  포르노가 여성의 신체를 '억압'한다면, 유사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신'을 억압한다.


구체적으로, 자기가 담겨 있는 세상 속에서, 자기의 목소리로, 자기를 이야기하자.
쉽게 말해서.. -_-;;
잘난 척 좀 그만하자.


Ⅴ. 페미니즘의 '포르노 비판' 검토 ;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1. 일단 간단한 흐름

* 다수의 페미니즘은 포르노를 반대한다.
* 소수의 페미니즘(분파들)은 포르노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을 비판한다(그러니 포르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것은 '검열'과 깊은 상관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니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시스템의 도구이자, 하수인으로서의 '위선적인 도덕'이 '선택' 자체를 박탈하는 '검열'이라는 국가권력의 오만에 저항하는 거지 뭐.

2. 어떤 페미니스트의 '포르노 탐험기'
 
이채, 이채 포르노를 말하다 2 ; 나는 왜 포르노를 말하나?
원문 - http://www.ichae1982.com/tts/index.php?pl=456&ct1=4

대체로 있을 수 있는 주장이고, 또 상식적인 서술이라고 느낀다.
다만 다소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글 가운데 모순들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_-;;

가장 큰 문제는 이거다.  

"포르노는 강간을 비롯한 수많은 폭력을 이상적 성행위나 남자다운 행동으로 그려낸다(강간과 폭력, 섹스는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포르노가 그들을 혼동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포르노의 가장 큰 죄악은 이 대목이다. 그 결과 천편일률적으로 폭력적인, 그래서 지루한 포르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경쟁적으로(그들은 포르노나 성에 적극적이거나 해박하지 못하면 '찌질이' 취급을 받는다) 포르노를 통해 성 지식을 습득하는 남성들은 이러한 편견과 오해들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의 지식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 이 되어버리는 셈이다"(이채). 

 - http://www.ichae1982.com/tts/index.php?pl=456&ct1=4 중에서

위 이채의 주관적인 진술들, 가설들을 지지하는 근거로서 채택된 '객관성'은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레이건 정부 시절의 '포르노 그라피특별위원회'의 결론이다. 그런데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결론'은 다음과 구체적인 맥락 하에서 존재하는 또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가설은 '강한' 가설이 아니라, 근거 희박한 '약한' 가설이다.

이를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는 글을 만나서, 그 글을 일단 인용하도록 한다.

남로당, 보수주의와 페미니즘의 동거에 반대한다 - 포르노를 허하라! 
원문 -  http://namrodang.egloos.com/1586581

이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 법무장관 산하의 "포르노그라피 특별위원회"의 조사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포르노는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포르노는 주로 성인 남자들과 소년들의 흥분을 목적으로, 그들의 색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다. 증거는 아직 불명확하지만 본 위원장의 의견에 따르면 포르노를 보고 소수의 위험한 사람들은 주변의 여자들에게 성폭력을 행사한다. 포르노는 이론이며 강간은 그 실천이다.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된 과정을 보면, 사회개혁운동인 페미니즘과 가부장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기묘한 연대관계를 볼 수 있다.

반(反) 포르노 여성운동가인 안드레아 드워킨은 위원회의 청문회 증언에서 요런 방법을 썼다.

1. 우선 아시아계 여자 모델이 나체로 나무에 몸이 묶여 있는 펜트하우스 사진을 보여준다.
2. 이어서 8살짜리 중국인 여아가 강간 살해당한 후 나무에 묶여 있는 뉴욕타임즈 기사의 사진을 보여준다.
3. 다시 펜트하우스 사진을 보여주면 이제 그 사진은 야한 사진이 아니라 엽기적 살인을 교사한 끔찍한 사진이 되어 버린다.
 
"포르노가 성폭력을 조장한다"는 결론이지만, 물론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 http://namrodang.egloos.com/1586581 중에서


어떤 '위원회'가 '조사'하고, '보고서'로 작성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미국 행정부 산하의 기구라고 해서 '객관성' 확보되는 건 절대 아니다. 위 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보고서와는 전혀 다른 '보고서'가 이미 있었다.  

1960년대에는, 포르노그래피를 단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므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19명의 권위자, 20명의 스태프‘외설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위원회’를 조직, 1968년부터 2년간 실증적 연구를 하였다. (그런데)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성에 대한 흥미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건강에도 이롭다. 그리고 포르노 문제 대부분은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보다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고 기술하고, 성인에 대한 포르노 판매 ·진열 ·배부 금지에 관한 법률을 모두 폐기할 것을 건의하였다(이상 n백과에서 발췌).   

냉전시대의 권위적 정부였던 80년대 레이건 시대와 혁명의 시대였던 68년(파리학생코뮨을 떠올려봐라)에(2년 동안) 쓰여진 그 두 개의 보고서가 갖는 차이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공기'와 일치하고 있다. 권력의 색깔은 어떻게 과학적인 듯이 포장되는 '사회과학적 학술조사'에 작용하는가? 이 두 보고서의 흥미로운 '차이'는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언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그러니 미국 행정부 산하의 위원회가 각각 상이한 그 시대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사실은 정치적이지 않은 '작용'은 없다는 것을 강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위 이채 글은

"포르노를 두고 찬반을 가르는 이분법적 도식은 이 많은 문제들을 은폐시키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며, 반 포르노 페미니즘 진영을 고루한 보수주의자들 편에 밀어 넣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르노를 반대하거나 금지할 것이 아니라 포르노를 들여다보고 알고 이해하고 분석하여 개입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는 전략(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1999, 서원)을 취해야 한다. 여자들이 포르노를 사이에 두고 까뒤집고 볶고 찔러대는 푸닥거리를 한바탕 해야 한다. [전복의 정치학은 그제서야 가능해질 것이다]"

라고 조언하고 있지만, 그 조언은 스스로에게 돌아가야 할 조언이다.

이채의 위 글은 "한마디로 포르노는, 나쁘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그 주장의 근거들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상투적이다(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그 주장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증명할 수 없는' 레이건 시대의 위선적인 '가설'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이채의 글을 채우고 있는 건 '타인의 목소리'들이다. 그 목소리들은 서로에게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는 '지금/여기'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실존이 없다.

Ⅵ. 결어 ; '지금/여기'에서 '자기 목소리'로 포르노 고민하기.
 

##님이 다음과 같이 방명록에 비밀글을 남겼다.

"포르노는 아무래도 옹호하는 마음은 안생기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은 그야말로 둘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래야 그만큼 가치를 갖는걸로 생각하는 구식 사람이라서. 그 f어쩌고 하는 사이트 기사 나온고 보고 내가 젤 먼저 뱉은 말은 욕이었음. 나는 아직도 '내 여자니까, 너를 지켜준다..'라는 말에 감동받는 사람임.ㅎㅎ. 쓸데 없이." 

나는 포르노 그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를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타인의 취향'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거의 항상 위선적이고, 자신의 욕망에는 너무도 충실한 권력과 권위는 쉽게도 '아랫 것들'의 욕망을 재단하고, 심판하는 가짜 권위 가짜 도덕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취향을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다면..
다른 취향 역시 인정하는 거.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명백한 범죄'(거듭 반복해서 확인하지만, 난 범죄임에 분명한, 그런데 포르노로 둔갑한 악질적인 상업주의에는 단연코 반대한다)가 아닌 한, 포르노에 가해지는 폭력들은, 그 포르노가 가한다고 주장되는 '폭력'만큼이나 야만적이라고 느낀다. 이 글은 그러니 포르노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의 성격이라기 보다는 포르노를 대하는 이율배반적인 의식의 집단적인 '폭력'에 대한 '방어'의 성격이 강하다.

포르노를 비난하는 그 대개의 논리들은 '그 비난'을 위해 '조직되고' '추상화되고' '정형화된' 상투형들을 갖는다. 그 근거들은 때론 서로 대립적인 논리적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그 흔한 오류들은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그 자본주의라는 현실, 남한이라는 공간의 공기 속에서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책 속에서, 막연하게 '타인의 목소리'를 빌여오기 때문에 흔히 생기는 오류라고 생각한다(물론 책은 많은 지식과 참고를 주지만서도).

타인의 목소리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유사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자기 목소리'를 갖는 '진정한 페미니즘'이 되기 위해서라도, 포르노에 대한 '학대'를 멈추고, 진지하게 다시금 '지금/여기'의 '권력과 성, 그리고 포르노'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검열'제도가 위헌판결을 받아도, 아직 우리에게 가해지는 권력작용, 그리고 그 권력작용의 배후에 존재하는, 때론 기생하는 '자본권력'의 시스템은 그 자체로 너무도 폭력적이다. 그건 포르노(를 빙자한 상업자본)의 폭력적 작용과 연동하면서, 또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포르노에 대한 추상적인 비난이 멈춰지고, '범죄 / (비범죄화해도 좋을) 포르노' 에 대한 구별이 서로를 존중하는, 다양성을 긍정하는 '관용의 대화'를 통해 좀더 명확해지길 바란다.



이상이다.


: )






p.s.
이 글은 본문에도 있는 것처럼 '2006년 9월 8일'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글은 '여기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3606 )에 한동안 보관했었습니다.
다만 '위 여기'의 운영정책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옮깁니다.
몇몇 부분은 추고했음을 밝힙니다.



  |  

포르노, 노골적인 희생양 [PP 연재 3]

2007. 3. 16. 12:53  |   포르노프로젝트  |   키노씨
1. 맹백한 사기극
포 르노는 가시적이고, 공식적인 현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이다. 그 현존 질서의 이면에 현존질서를 '조정'하는 권력이 있다. 그 권력은 자신을 스스로 법, 도덕으로 부른다. 그 권력은 포르노라는 '희생양'을 선택하고, 그 포르노를 '비도덕의 극치'로 비난한다. 그리고 그것에 '금지' 표지를 부착한다. 그 법의 공식적인 입장은 '선량한 도의관념'이라는 모호한 언어적 조작이며, 눈가리고 아웅이다. 그 권력은 판단하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들의 욕망을 대신한다. 그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욕망들을 심판한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욕망은 팽창하고, 그런데 그것이 팽창하면 팽창할수록 우리의 '비공식적인' 욕망에 대한 죄의식은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그 위축이 효과적으로 내면화되면, 공식적인 법, 도덕의 커튼 뒤에 있는 그들은 흐뭇한 미소를 날린다. 그들은 그 욕망을 이용하고, 스스로는 실현하며,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한다. 

명백한 사기극. 
포르노를 둘러싼 이 위선적인 도덕 구조, 혹은 지배구조.

억 압은 '과시적인' 위선을 낳고, 그 위선은 은폐된 욕망을 낳고, 그렇게 해소되지 못한, 그런데 용인될 수 있'었'던 욕망들은 '폭주'해서 타락과 범죄를 낳는다. 그런데, 아니러니하게도 흔히 타락과 범죄를 즐기는 자들은 권력과 친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타인의 욕망에 대해서만 심판한다. 용인될 수 있었던 욕망은, 용인될 수 없는 타락으로 '변질'된다.

범죄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욕망을 범죄적으로 실현하는 메카니즘.
위선과 도덕과 차별적 욕망의 실현.

권력은 한번도 자기의 욕망에 부끄러운 적이 없다. 

개인적인 욕망이든, 사회적인 이상의 실현이든..
그 방식이 투명하고, 합리적이며, 문화의 틀 안에서, 제도의 틀 안에서 서로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인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Rene Magritte


2. 차이에 대한 학습, 그리고 당연화된 차별
그 위선적인 도덕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그 이분법을 쉽게 내면화한다. 포르노 종사자들, 혹은 거기에 호의적인 '그들'은 '저기'에 있고, '우리'는 안전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경멸의 대상이거나, 보호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보호받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민망한 시츄에이숑.  

그들/우리를 구별하는 표준은 과연 무엇인가? 법? 도덕?

그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스스로 내면화된 학습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들은 항상 비천한 직업(포르노 종사자들..그들은 직업인인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포르노 배우 혹은 창녀는 우리들의 순결한 도덕을 증명하는 타자들이고, 그 타자들을 낯설게 하고, 억압할수록 우리들의 고결함은 높아진다.

그러니까, 우리들, 그 안에 있는 어떤 욕망, 자연스러운 꿈틀거림, 그리고 문화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뽀얀 어떤 것들은 그 색을 바꾸고, 그 향기를 바꾼다. 그것은 추악하고, 숨겨져야 하는 어떤 쓰레기로, 어떤 '변태'적인 것으로 '변신'한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그 욕망들이, 그런데 아직 변질되기 전의 그 순수한 욕망 그 자체가 목소리를 낸다.

"놀고 있군".


3. 포르노와 범죄, 그들/우리. 

나는 포르노를 제작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배우들을 '직업'으로 인정한다. 물론 포르노를 빙자한 범죄행위들(그 범죄는 그 나라와 문화마다 상대적이겠지만)에 대해선 단연코 반대한다. 이를테면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어떤 반사회적인 범죄들. 그건 (내가 이 글에서 비범죄화하자는) 포르노가 아니라, '그냥' 범죄다.

그러니까 난 지금/여기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취향에 대한 자유와 그 선택권에 대한 탄압(최근-2006년 8월-에 벌어진 'F사이트' 사건 )에 반대한다. 그들은 '우리'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이 된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법(참조 : 이 사건의 적용법률인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과 소위 형법상의 '음란죄'에서 핵심 구성요건인 "음란한" 이란 문구에 대해선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은  그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그들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향해 내려진 법의 '심판'에 마주한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그들은 마치 순교자처럼 당당하다.
법의 심판 앞에 선 운영자는 그들을 대신한 또 다른 희생양이며, 그들은 우리들의 희생양이다.

황지우는 [나는 너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가장 무서운 병은 아내와 그 짓을 할 때도 머리 속으로는 음란 비디오의 그 白人 여자에게 성기를 박고 있는 참상이다. 하얀 것은 참 더럽다".

'하얀 것'은 포르노인가?
아니면 당신/우리에게 익숙해진 그 억압과 위선인가?
그것도 아니면, 하얀 것으로 상징되는 순결와 고결로 위장한 당신/우리를 조정하는 권력인가?



 

0. 이 글을 위해 다시 읽고, 참조한 문장들 - 김현, [폭력의 구조 ; 르네 지라르 연구] 중에서.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18).

 

순수와 비순수의 구별이 없어지면... 문화의 위기가 생겨난다. 순수와 비순수의 구별 뒤에 숨어 있던 '폭력의 무차별적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 비극에 나오는 살부, 근친상간, 페스트 등은 차이 위기의 상징들이다. ... 위기의 절정에서 그것을 막는 희생물이 선택되는데 그것이 속죄양이다(47, 8).


욕망의 유토피아를 서로 실현하기 위해, 서로의 욕망을 해방시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문화적 위기, 무차별 현상은 가속화된다. ... 해방적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공격하여 없애려는 사항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따름이다. 희생양은 프로이트주의의 아버지, 법 등이며, 마르크스주의의 부르조아, 자본가 들이며, 니체의 노예의 도덕, 타자의 원한 ... 등이다(61).
해방적 이데올로기, 혹은 탈신비화는 금기를 제거하여 사람들을 차별없게 만들어 희생 제의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 것이다(61).
금기가 없어지면, 사회건설적 폭력이 그 긍정적 힘을 잃고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 그런 의미에서 그(르네 지라르)는 반현대주의자이다(62).
(지라르의) 폭력적 담론의 정치학은 기존질서의 유지이며, 그것의 성화이다(앙리 메쇼니크). 앙리 메쇼니크의 지라르 비판은 지라르의 도덕주의, 엄숙주의에 대한 통렬한 항의이다(64, 5).
=> 지라르 이론의 수구성, 기존 현실질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문장들. 지라르 이론의 수구적 정치성이랄까?


박해에 대한 인류학적 텍스트에는 희생자가 속죄양이라는 것을 말 안 하는 '감추는 텍스트'와 그것을 '말하는 텍스트'의 둘이 있다. 신화적 텍스트는 앞의 부류에 속하고, 성서는 뒤의 부류에 속한다(66).


신화는 박해현상을 신비화시켜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야기다(69). ... 집단적 폭력이 지워지고, 개인적 폭력이 그것을 대치... 그 개인적 폭력까지 지워버리려 한다(그리스 로마 신화). ... 이 단계를 너어서면, 집단적 살인의 흔적 지우기, 흔적의 흔적 지우기라는 목표만이 남게된다(69).


복음서의 진정한 독창성은, 완전한 예수의 무죄성을 통해 박해체계의 폭력성을 탈신비화시킨데 있다. 그도 다른 희생자처럼 죽지만, 그는 신비화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으로 희생제의적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된다. 문화가 희생기제 위에 세워져 있다면, 그 기제는 그것의 기능이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기능하는데, 그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되니까, 수난에 의해 예수의 지상왕국은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서구문화는 그 예수의 수난을 왜곡하여 세운 문화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서구문화는, 모든 문화의 허구성을 탈신비화시키는 탈구적 문화이며, 동시에, 그 전언에 기초하여 희생 제의를 만들어낸 구조적, 신비화 문화이다. ... 탈신비화의 기독교는 또한 신비화의 기독교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드는 순간, 기독교는 신화가 되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된다. 기독교 서구 문화가 제국주의적 박해문화일 수 있는 것은 예수 수산을 제의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성서를 제의적으로 읽으면 안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비제의적 텍스트이다(71,2).


욥 자신이 자기의 죄를 수락하고, 그들의 단죄를 받아들인다면, 속죄양의 유죄는 그야말로 만장일치가 될 터인데, 그는 항의한다. 그 항의가 욥을 진짜 속죄양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 요인이며, 욥의 이야기를 신화로 변모시키지 못하게 한 요인이다. ... 그런 의미에서 외디푸스는 성공한 속죄양이며, 욥은 될 뻔한 속죄양이다. 더구나 그는 끝에 다시 신의 축복을 받아 속죄양의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될 뻔한 속죄양이다. 욥에 비할 때, 예수는 완전한 속죄양이다. 예수는 욥이 반밖에 성공 못한 일을 완성한 분이다. 그의 완성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일로 이뤄진다. 예수의 수난을 통해 욥의 불평은 있는 그대로 이해될 수 있께 된다. ... 욥의 불평을 이해하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난다. 예수가 그 때 나타난다. ... "그가 폭력과 성스러운 것의 논리를 벗어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예고한다". 욥은 옛사람들이 꾸준히 걸어가던 속죄양 만들기, 집단 살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탄식은 오늘에도 여기저기서, 특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모든 나라에서 울려나온다(73 ~ 75).


동물적일 만큼 잔인하고 한이 없는 모방 욕망은 그것의 흉포함을 종교라는 탈 속에 감추고 있다. 지라르의 가설은,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와 마르크스적 비판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인류학에 종교의 중요성을 되돌려주는, 사회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뒤르켕의 이론이나 [토템과 터부]의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다(101).


예술 작품은 초석적 폭력의 자의성과 첫 희생물의 우연적 선택의 회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을 보면서, 개인은 폭력을 회상하고 불만을 정화한다(102).



<참조문헌>
김현, [폭력의 구조 ; 르네 지라르 연구] (김현전집 10), 문학과 지성, 1992.




p.s.
이 글은   http://wnetwork.hani.co.kr/skymap21/3508 에 썼던 글을 지우고, 추고해서 다시 옮겨온 글입니다.



  |  

대추리와 포르노 [PP 연재 2]

2007. 3. 15. 11:09  |   포르노프로젝트  |   키노씨

0. 자다가 봉창 ; 웬 대추리?

관련없다. 관련있다.
이 둘 중의 하나인 건 아니고,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뭐. 이건 주관적인 거다. 그리고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건 또한 정도의 문제인 거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 정치적인 상상력에 관한 문제이다.


1. 포르노, 죄의식과 기쁨들.

포르노를 대하는 감수성은 이중적이다.
유교적 도덕 교육이 내면화된 자들에게,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에게 포르노를 향유한다는 것은 죄의식과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건 물론 심각한 죄의식은 대체로 아니다. 그리고 그 죄의식은 점차로 희미해진다. 반복은 감수성을 무디게 한다. 일상이 괴물인 이유는 '반복'에 있다. 그건 '학습'이다. 그 일상은 '놀라움'을 잡아 먹는다. 물론 일상은 그 자체로 기적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그 죄의식이 크면 포르노는 더 유혹적이 된다. 그건 기쁘다, 그건 행복하다. 그건 금기에 대한 도전이면서, 가치에 대한 전복처럼(!)('처럼'이다) 느껴진다. 사춘기 모험으로서의 포르노가 갖는 기쁨과 이미 어른이 된 '중년'의 "연구용"(한 블로거의 비밀방명록 표현을 빌자면 ^^;;)으로서의 포르노가 주는 기쁨은 다르다.

2. 대추리, 죄의식과 핑계들. 

대추리를 대하는 감수성 역시 이중적이다.
국가주의적 폭력에 대한 순응적인 감수성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견고하게 내면화/구조화 되었고,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거치면서 그 내면화된 두꺼운 껍질에 균열이 일어났다. 87년 6월 항쟁은 그 상징이다. 그리고 우리는 양김 시대를 거쳤고, 현재 스코어 우리는 노무현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 혁명은, 개혁에 대한 그 열정과 소망은 그저 '추억'이었을까?
이제 다시 우리는 박정희 시스템으로 회귀하고 있다.
물론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 대추리, 그 기만의 매트릭스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1977
*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273

386(지금은 486으로도 불리는) 세대의 '변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은 집권했고, 그들이 이제 당대를 대표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대추리' 같은 문제가 생긴다. 그건 국가주의의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그게 아무리 행정대집행이라는 '합법'으로 가장해 있더라도 그렇다. 그게 폭력인 이유는 최소한의 절차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만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은 우리 주권 위에 있는 존재고, 노동자는 매맞아 죽는다(포스코 글1. 글2).
그런데도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다.

그 평온한 우리에게 '대추리'와 '포스코'는 불편한 죄의식이다. 그건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래야 우리가 평안하니까. 그래야 노무현 정권에서 사는 우리가 그래도 스스로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 죄의식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
그건 돈이다. 여기에 '돈'이 들러 붙는다. 그 돈을 '표준'으로 타인의 진정성을 자기와 비교한다. "배부른 농민들이 돈 더 받아 처먹으려는 지랄", "귀족노조 너희들 짜증난다". 이런 식이다. 물론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조선일보에서 써준대로(조선일보는 우리시대의 주술사다),  '감'으로 그렇게 가짜 안락과 평온을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다. 전형적인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 그 기만의 시스템.



3. 포르노와 대추리, 그 기만과 죄의식의 함수관계

*
나는 실은 궁금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일견 억지스러워 보이는 이 글은 그저 나의 궁금함에 대한 내 스스로의 대답일 뿐이니, 이 글이 당신에게 어떤 '한 소식' 전하리라는 기대는, 솔직히 나에게는 없다. 어떤 금지와 내면화된 억압, 그걸 극복하거나,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좌절되거나, 평온하게 느껴지는 방식이 나에게는 궁금하다.

*
포르노의 죄의식은 그것을 '극복'했을 때, 그 '금기'를 넘어섰을 때 돌아오는 기쁨이 커지는 죄의식이다. 포르노의 죄의식과 기쁨은 비례한다. 포르노의 '죄의식'은 그것이 자본의 영향력 안에서 교묘하게 증폭되면서, 상업적으로 소비되기 때문에 오히려 '조장'되기까지 하는 죄의식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방식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의식을 속이는 과정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대추리의 죄의식은 이것과 반대다. '극복'하거나, '기만'함으로써 일상의 안락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죄의식이면서, 그래서 그 기쁨은 죄의식을 '속이는' 과정을 통해서 돌아온다. 이것은 위 포르노가 자신의 죄의식을 상업적으로 증폭시키는 그 과정의 은밀함과 비교하면, 적극적인 기만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숭미적 수구세력이다. 더 심각한 건 여기에는 여야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 형님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
다만 포르노와 대추리는 유사한 메카니즘을 갖는다.
그건 욕망과 소망에 대한 기만이면서, 그 활용이면서, 그 기만의 합리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4. 대추리와 포르노, 그 해방과 공존을 위하여

*
포르노를 통해 자본은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 재생산 과정에서 인간의 본능은 왜곡된다.
대추리를 통해 미국은 스스로의 권력을 확대재생산한다.
그 재생산 과정에서 한국의 주권은 왜곡된다.

그 둘은, 하나는 (위선적인) 도덕적 윤리의식을 상징하는 키워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연대) 의식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그런데 그 둘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내 보기엔 그 둘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 그것은 왜곡되어 있으며, 일방적으로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으며,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다.

*
나는 포르노에 대한 일방적인 반대, 그 위선들, 근엄한 척 하는 국가권력에 반대한다. 그와 더불어 '포르노'를 빙자한 온갖 범죄들에도 반대한다. 포르노는 그냥 포르노다.
그리고 대추리를 일방적으로 왜곡하는 조선일보 월드의 위선과 거기에 편승하는 대중심리, 그래서 쉽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그 순응화된 의식들에 반대한다. 대추리는 빨갱이들이 지랄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소박한 농민들이 자기 땅 지키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곳일 뿐이다.


*
물론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대추리와 포르노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인간의 본능들, 그 자연스런 욕망과 소망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거다.

그런데 그 소망이 실현되는 날, 아니 거기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체험하는 것조차, '밑으로부터', '멍청한 대중'이라고 비아냥 받는 우리들이 '시민'이라는 주체로 다시금 자신의 존재조건을 명확하게 정립하지 않는 한 영영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대중vs시민). 우리들은 조정받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좌표를 인식하고, 그 조건들을 조율하는 자로 태어나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래 우리에게 속한 권리를 다시 되찾아 오기 위한 가장 유효한 싸움과 저항 수단(중의 하나)은 블로그다. 블로그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는 낙관적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웹상의 일기에 불과한 것으로 블로그는 무시되기 일쑤다(물론 개인적인 성찰을 위해서 글을 쓰는 일기로서의 블로그의 역할 역시 나는 굉장히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 일기는 '공개되어 있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관계적'이고, 그 나름으로 연대적이다).  그리고 그 블로그를 대하는 '전통 언론'의 관점도 구태의연하다. 안타깝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공산당 선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바뀌지 않았을까?

만국의 블로거들이여 단결하라!



p.s.
이 글은
2006/08/23 02:16 제 한겨레 블로그에 등록했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