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21

영화 TV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

프리즌 브레이크 - 단상 1

2007. 2. 22. 18:21  |   리뷰  |   키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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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브레이크 Prison Break
[20세기 폭스 TV. 2005. 8. 29. ~ 2006. 5. 15. 시즌 1-22편 종영. 현재 시즌 2 방영중]
[총제작자 : 폴 슈어링 Paul Scheuring]







 프리즌 브레이크 Prison Break - 단상  1.
; 스피드 액션 컨스피러시 드라마








0. [24] 땜빵용이었구나!

이 글을 쓰기 위한 기초자료(?) 찾다가 알게된 사실인데, [프리즌 브레이크](이하 '프리즌')은 [24] 시즌 공백을 메우기 위한 단발성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박난거다. 폭스로서는 끝내기 어려운 프로젝트가 된거구(이건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사정이 비슷한 것 같다). 지금 '프리즌'은 시즌 1, 22편이 성공리에 종영되었고, 나는 시즌 2, 17편까지 본 상태다. 최종적으론 44부작이 될 거라고 하더라.


1. 스피드 액션 컨스피러시 드라마

[24]와 '프리즌'의 공통점은 속도 + 음모 + (끊임없는) 반전들이다.

양자를 모두 흥미진진하게 지켜본 나로선, 역시나 지존은 [24]다. 속도에서 [24]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렇게 빠르게 전개되는 드라마를 나는 본 적 없다. 이와 비교한다면, '프리즌'은 평균보다는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주고 있지만, 워낙에 태생적 한계(시즌 1의 경우엔 감옥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땜빵이라는 제작여건상의 한계)을 지닌 드라마라서... 그 속도감은 [24]만큼의 쾌감으로 질주하지는 못한다. 내러티브의 얼개들이 좀 느슨하고, 좀더 캐릭터에 집중한달까?


2. 석호필

'프리즌'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모든 성공한 드라마가 그런 것처럼, 캐릭터의 재미다. 그 중심에 '마이클 스코필드'(우리나라 네티즌 작명 : 석호필)가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 배우 어디서 봤는데... '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 로버트 벤튼. 2003)에서 안소니 홉킨스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던 그 친구다.

[잠시 딴짓] 찾아보니까, [언더월드](Underworld. 렌 와이즈먼. 2005)와 [스텔스](Stealth. 롭 코헨. 2005)에도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런데 기억이 없다. -_-;;


3. 천재와 둔재 - 유쾌한 희생양

이런 류의 드라마들이 갖게 하는 심리적인 반응들은, 저 녀석이 어떻게 이 모든 위험을 헤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다. 이 기대감에 반하는 인물들은 죽을 수 밖에 없다(살벌하다, 정말). '프리즌'에서도 그런 '둔재형'이 등장한다. [24] 시즌 3에서도 그렇지만, '프리즌'에서도 정말 어처구니 없게 둔감하고, 답답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둔재(스포일러라서 자세한 얘기는 못하겠지만)의 죽음은 일종의 쾌감마저 준다. 왜냐하면, 그 둔재는 드라마의 속도를 방해하고, 또 액션-반응-심리 과정의 증폭이 가져오는 쾌감을 다운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죽어도 되는건지 어쩐지는 난 잘 모르겠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그저 가공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 답답한 인물이 죽으면서, 혹은 그 짜증나는 인물이 죽으면서 느껴지는 일종의 '비도덕적인 악마적 쾌감'은 일상적인 의식의 심연에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답답한 인물이, 대체로, 여자라는 사실이다.

-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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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 죽음의 무게

2007. 2. 21. 21:06  |   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전남대 교지 [용봉](겨울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서툰 블로거에게 원고청탁해주신 용봉 편집장 은아양의 용기에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합니다(0.은 그냥 통상적인 광고문구의 조합에 불과하구요). 이 글은 다소 긴 글입니다.  

▲ 라이토, 류크, 그리고 L
[데스 노트 - 전편. Death Note.  카네코 슈스케. 2006]






데스노트, 죽음의 무게





0. 
사는 게 따분한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학생 라이토. 그는 어느 날 ‘죽음의 노트’를 줍는다. 거기에 이름을 올리면, (물론 이름이 올려진) 그 사람은 죽는다. 그렇게 라이토는 스스로 법이 되어 사형을 집행한다. 계속된 범죄자들의 죽음, 그 행렬 속에서 라이토, 아니 베일에 싸인 ‘키라’라고 불리는 상징은 대중적 열광의 대상이 되고, 이에 수사당국은 이 미증유의 사건을 풀기 위해 수수께끼에 쌓인 탐정 ‘L'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라이토와 L은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누가 그 게임에서 승리할 것인가. . .


1. 
[데스노트]는, 가볍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게임세대를 위한 영화(혹은 만화)다. [데스노트]의 세계는 승자와 패자가 있어야 하는 세계다. 여기서 무승부는 의미 없다. 이 게임, 주사위를 던지며 희희낙락하는 심판자이자 구경꾼은 그저 영원히 살아야 하는 영생이 따분한 사신(死神)이다. 신(들)의 게임에 던져진 주사위로서의 인간.


2. 
이번엔 좀 진지하게 가자. [데스노트]의 마스터내러티브(masternarrative. ‘거대서사’ ‘지배담론’ 혹은 그저, ‘원형적인 틀’, 리오타르가 ‘거대서사’에 대해 갖는 부정적 어감은 여기에는 없음을 밝힌다), 즉 그 원형적인 틀은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면, [아키라](오모토 가쓰히로, 1988)다. 그 [아키라]를 보고 있으면 나는 [헐크](이안, 2003)가 생각난다. 그건 초인에 관한 텍스트고, 또 허무주의에 관한 텍스트면서, 무엇보다 초월적 권력에 관한 텍스트다.


그 진짜 마스터내러티브는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 혹은 [권력에의 의지]다. 권력은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거듭 확대재생산 된다. 그 권력을 작동하는 힘의 원천은 그 권력 자체다. 그 의지, 그 추구 자체. 니체는 이 곳 저 곳에서 아직도 계속 태어나고 있다. 


3. 
좀 더 풀어보자. [데스노트]는 아키라 혹은 헐크의 '청소년 버전'이다. 10대와 20대를 겨냥한 것이 분명한 [데스노트]의 아이디어는 황당할 만큼 단순하다. 그 단순한 아이디어로 출발한 이야기는 탐정영화와 라이벌 영화의 얼개를 빌어 아기자기하게 조직되고, 진행된다. 그 단순하고 명쾌한 설정과 아기자기한 진행, 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본질적인 욕망을 키치적인 감수성으로 꾸며내는 화장발까지. 그러니 영화(혹은 만화)는, 꽤 흥미롭다.


이 흥미와 재미는 게임 장치들에 힘입은 바 크다. 그 게임 장치(들)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론 죽음의 노트다. 선과 악, 그리고 죽음을 판단하는 어떤 초월적 의지를 갖는 권력과 그 권력을 매개하는 죽음의 노트가 있다. 그리고 죽음을 둘러싼 게임. 아니 게임을 둘러싼 죽음들 사이에 빛나는 이성으로 무장한 귀여운 미소년들이 있다. 거기에 미소년들을 둘러싼 그 묘한 광기들. 그러니 이건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다. 나는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썼다.


이건 물론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건 우리가 ‘학습한’ 경쟁심을 재현하고 있으니까. 이 게임의 룰은 ‘이기면 장땡’,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왔던 그 거다. 사춘기의 묘한 경쟁 심리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승부욕. 그 외에 어떤 고민도 어떤 실존적인 회의도, 영화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데스노트]에는,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 도달하고자 한, 그 피안에 존재하는 어떤 순결한 욕망, 그 추구, 그 한없는 인간에 대한 갈구가 없다. 게임만이 있을 뿐.


그래서 [데스노트]의 게임은 재미있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하/다. 그 게임에서 죽음은 소모적이며, 거기에 실존적인 고민의 흔적은 없다. 그건 ‘쿨하지 않은거니까’.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건 게임이니까. '죽으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게임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4. 위험한 텍스트, 위험한 게임

게임 소품이 죽음의 노트라면, [데스노트]라는 게임을 지배하는 공기는, ‘싸이월드’류의 문화가 보여주는 ‘비교의 감정’, 그 천박하며, 속물적인 감수성이다(물론 속물 아닌 사람 없다. 산신령 빼고). 관객들은 ‘내가 라이토라면, 내가 L이라면’ 이라고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이기고 싶어진다. 이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문제되지 않으며, 여기에 수반되는 죽음은 고민되지 않는다. 물론 이건 모든 상업영화, 좀 더 특정하면, 라이벌 영화가 갖는 드라마의 관습이긴 하다.


[데스노트] 역시 이 관습을 충실히 따른다. 다만 [데스노트]가 갖는 특별함이랄까, 혹은 새로운 감수성의 수용이라고 평가할만한 점은, ‘선악’을 상투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점이다. 이건 물론 가능성이다. 그 선악에 대한 상투형을 거절하는 이 텍스트가 그 선악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은 없다. 그저 단순하고, 쿨한 거절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쿨하다는 거, 그 폼나는 감수성은 공허한 감수성일 뿐이다. 그건 정말 아쉬움이다.


주인공을 통해 보자면, 죽음과 그 매개인 죽음의 노트를 둘러싼 라이토와 L. 그 둘은 한 몸의 다른 모습이다. 그 둘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다. 그 둘을 엮는 매개는 ‘죽음’이 아니라 '게임'이며, 또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누가 이길 것인가라는 경쟁심리다.


좀 더 풀면, [데스노트]가 보여주는 그 무수한 ‘소모적인 죽음’들은 처음에는, 선/악의 경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시적인 죽음들’이며, ‘교훈적인 죽음’들이다. 그것은 권선징악을 표현하고 있다. 다만 어느 순간 라이토의 권력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건 권력의 속성이며, 권력을 가진 자의 슬픈 운명 같기도 하다. 라이토의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등장하는 ‘L'을 움직이는 힘 역시, 전통적인 선악개념이나, 윤리적인 고민의 소산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그저 게임을 할 뿐이다.
우리들이 그저 게임을 하듯.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승리감을 도취하기 위해, 게임을 하지, 윤리적으로 고민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게임하지는 않는다.


그 게임에서 사람들은 죽는다. 그들은 범죄자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 죽음은 콜레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희생)처럼, 마치 강자의 싸움에서 희생되는, 주변적이고, 힘없는 죽음처럼 차갑고, 쓸쓸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죽음을 고민스럽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니까.
이건 정말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5. 데스노트, 죽음의 무게. . .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바보’들이다. 앞서도 이 영화는 10대와 20대를 위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시종'(L의 비서역할을 하는 할아버지)이거나, 멍청한 경찰(라이토의 아버지, 그 밖에도 'L'의 ‘따까리’로 등장하는 그 무수한 경찰들)로 묘사된다. 그건 현실에 대한 반영이면서(어차피 이 영화의 고객이 어른들은 아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그 기성세대에 대한 조롱이다(그래야 아이들이 좋아하지).


그 ‘어른들’은 죽음에 대해 ‘심판’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애써 잡은 범죄자들을 풀어 줄 수밖에 없는 ‘바보 같은 제도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니까. 그 심판을 대행하는 건 라이토이며, 죽음의 노트이며, 타락한 세상에 대한 무력감, 허무주의에 빠진 초인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꿈꾸는 영웅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초인은, 니체의 초인이 아니라, 그저 ‘게임 속 슈퍼히어로’일 뿐이다. 물론 미세한 갈등의 징후들을 영화의 이미지 속에 문득 흘려보내고 있긴 하지만.


죽음의 문제, 형법적 정의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칸트는 이야기한다. “세상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이른바 ‘동해 응보론’로 불리는 칸트의 형법적 정의, 응보사상은,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상징할 수 있는 정의다. 살인한 자에게는 죽음을.

이에 대해 헤겔은 ‘동가치 응보론’을 이야기한다. 가령, 인신을 구속함으로써, 그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그 범죄에 답해도 괜찮다는 거다. 절도를 범한 자에게는 1년을, 상해를 범한 자에는 3년을, 살인을 범한 자에게는 5년 이상...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역시나 어떤 철학이든, 윤리이든, 종교이든 가장 무거운 근심은 ‘죽음’이다.

[데스노트]에서 죽음은 그저 게임의 결과이거나, 과정일 뿐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죽어야’ 마땅한가, 혹은 ‘죽어도 괜찮은가’라고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데스노트]는 보여주진 않는다. 물론 지나가는듯한 몇 마디 대사 속에서 우리는 그 가벼운 고민,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긴 하지만.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상업영화에서, ‘죽음’은 흔히 소모적이며, 너무도 강한 휘발성을 갖는다. 가령 무수히 많은 죽음을 뒤로 하고 그 모든 위기들을 빠져나온 주인공은,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과 해피하게 웃으며 키스한다. 물론 여기서 죽음은 ‘영화 장치로서의 죽음’이며, ‘상징으로서의 죽음’이긴 하다.


우리들 중 많은 수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면서, 또 이렇게 문화적 상징들로서의 ‘죽음’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 이율배반을 상업영화들, 자본주의의 문화 상품들은 견고화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강요’한다. 사형제도를 [데스노트]와 연계해서 고민할 수 있다면, 다소간 비약적인 상상력이라고 할지라도, 그 질문과 고민이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돈주고 보는 거니까, 뭐라도 남겨야지(뭐라도 남겨야지, 하는 사고방식은 요즘 세대에게는 좀 쿨하지 못한건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많은 문화상품들을, 그저 기획자의 의도에 의해 조정당한 채로 ‘소비’한다.  우리는 이윤추구를 위해 고안된 고도로 발전한 상품 마케팅의 표적이 되어, 그저 의미 없이 그 문화적 텍스트들을 돈과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지불하며, 흘려보낸다. 아무리 상업영화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들의 해석’을 담을 수 있고, 거기에 우리의 실존을, 그리고 우리의 삶과 죽음과 그것을 조율하는 사회제도, 그리고 그 제도의 모순에 대해 도전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


[데스노트]는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그 고민의 제스처를 아주 살며시 흘려보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데스노트]를 우리들의 ‘해석을 통해’ 다시 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가 끝나고, 만화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우리들의 흥미로운 ‘진짜 게임’은 시작한다. 나는 그 게임이 죽음의 무게, 사형제도, 그리고 우리들을 둘러싼 경쟁에 대한 강요, 그 숨막히는 시스템과 제도의 위선에 대한 고민어린 도전이길 바란다.


사족. 
여자는 [데스노트]에서 주변적이다(라이토의 애인이나 FBI 수사관의 애인). 여자는 이 영화의 '에피타이저' 역할에 머물 뿐이다. 라이토에게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존재는 '글쎄?'일 뿐이다. 그 가느다란 잠시의 의문은 L이 등장하면서 너무도 쉽게 잊혀진다.




#. 재미삼아 별점

* 총평점 : ★★★

* 영화적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p.s.

이 글의 주된 텍스트는 [데스 노트 - 전편](Death Note, 카네코 슈스케, 200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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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스스로를 사유하다 - [록키 발보아] 프리뷰

2007. 2. 14. 22:16  |   프리뷰  |   키노씨

#. 이 글은 프리뷰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스포일러와는 상관없습니다. 이 글은 짧은 글입니다.



 

 
록키 발보아 (Rocky Balboa, 2006) 
미국. 102 분. 개봉 2007.02.14
실베스터 스탤론 (Sylvester Stallone)





록키, 스스로를 사유하다
- [록키 발보아] 프리뷰




0.
[록키1]는 '위대한' 영화다.
그건 [람보1]이 '위대한' 영화인 것처럼, 혹은 [스타워즈]가 위대한 영화인 것처럼, 그렇게 위대하다.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가 '훌륭한' 영화인 것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록키1]과 [람보1]은 위대하다. 이 위대한 영화(혹은 위대한 캐릭터)들은 상처받은 이민자의 정서를, 그리고 소외받은 월남전의 기억과 풍경을, 가장 매력적인 드라마 / 액션으로 재현했다. 이 영화들은 한 시대의 상처와 희망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상업영화의 걸작들이다.

하지만 그 영광 이후, 스탤론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록키]시리즈와 [람보]시리즈는 미국 패권주의의 '판타지 오락물'로 스스로 환골탈태해서, 자기가 태어난 존재근거를 망각하고, '불쌍한 아시아'를 구원하는 오만한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을, 이분법적 냉전 사고방식의 야만을, 스스로 실천했다. 스탤론은 '도전자'가 아니라, 이제 '챔피언'이 된 자신을 나르시즘에 빠져 만끽했다. 그 [록키]와 [람보]시리즈는 레이건 시대의 패권주의와 제국적 욕망을 그대로 상징한다.


1.
그 스탤론이, 한물 간 과거의 액션 영웅이 [록키 발보아]로, 기/적/처/럼, 돌아왔다.
마치 자신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 스탤론은 스스로의 영화적 역사를, 자기 존재의 흔적들을 사유한다. [록키 발보아]는, 비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보여준 그 비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 사유와 고민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그 미덕은 다소간 상투적인 '도전정신'이다. 그건 [록키 발보아]의 사유가 '상식주의'와 '미국적 관습의 전통' 안에 존재함을 말한다.

앞서 말했듯, 그 두 개의 영화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로 다른 장르 영화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스스로가 거대한 상징으로 존재했던 도그마화된 페르소나를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사유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서부영화의 관습과 상징들을 해체하고, 스스로가 그저 '실존'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함을 고백하고 있다면, 그 깊은 고백으로 사유의 그 밑없는 심연을 보여줬다면, 스탤론은 다소간 감상주의에 빠져서(하지만 진심을 다해!) 스스로가 이루려고 했던 소망을 다시 여기서 재현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그 고민과 사유, 반성의 풍경은 같지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에 가깝다.


2.
[록키 발보아]는 스스로 영광을 쟁취하는 영화이며, [용서받지 못한 자]는 스스로 영광을 반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깊은 존경을 얻는 영화이다.

[록키 발보아]의 아쉬움은 (그 아쉬움은 또 다른 관객에게는 그 만큼의 매력일 수도 있을텐데) 전반부의 내러티브가 반성적 사유와 낭만적 기억 속에서 놀랄만한 영화적 비전으로 나아갈 만한 토양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내러티브는 그 비옥한 토양에서 과거의 영광을 나르시즘적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키 발보아]는 [록키1]의 영광을, 스탤론의 온 마음을 다해, 지금 여기서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록키1]의 관객이라면, 그 추억을 자신의 내밀한 영화적 기억의 창고 한 켠에 보존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록키 발보아]를 거절하기란 몹시 어려울 것이다.



p.s.
난 이 영화 보면서 좀 울었다.



#. 재미삼아 별점

* 총평점 : ★★★★

* 영화적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 좋은 잔상 : 록키답지 않은 록키의 모습들.
* 나쁜 잔상 : 성급한 화해를 보여주는 장면들. 흑인 챔피언의 실존적 고민에 대한 관심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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