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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를 옹호함 [PP 연재 1]

2007. 3. 13. 09:23  |   포르노프로젝트  |   키노씨
#. 이 글은 한겨레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을 옮겨온 글입니다.
한겨레 블로그인 필진네트워크의 운영정책(특히 잡.보.지.글방 폐쇄에서 드러난 권위의식과 절차의 불명료성, 그리고 근거의 불명확함)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콘텐츠를 옮겨오고 있어요.
이제 이 포스트는 여기에서만 읽을 수 있습니다(뭐, 대단한 포스트는 아니지만요. - - ; ).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변태란 과연 무엇이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포르노를 옹호함





1. 포르노에 대한 증오

포르노는 쉽게 증오의 대상이 되고, 그런데 이면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인이 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감수성과 남자동물로 지내온 학창시절의 경험칙에 의하면 그렇다. 물론 난 여자동물이 아니라서 여자는 어떻게 느끼는지, 그녀들의 학창시절은 어땠는지 잘 모른다. 마치 사랑해서는 안되는 원수를 사랑하는 비련의 남자가 떠오른다. '밤에 피는 장미'(아하~~ 밤에 피는 장미, 나의 사랑~~, 이런 노래가 있었다), 그런 노래도 덩달아 떠오르고. - -;;;


왜 포르노를 싫어하나? 왜 증오하나? 보긴 봤나?

상식적인 페미니즘의 대답은 예상 가능하다. 그것은 여성의 신체를 도구화하고, 수단화하고, 상품화한다.는 거지, 뭐.


그런데 좀 냉정하게 말하자.
이미 몸은 도구이자, 수단이자, 그리고 '상품'이다.
이건 남녀불문이다.


아해들이 온통 열광하는 그 연예인들, 그 연예인들의 얼굴과 다리와 가슴과 허벅지는 이미 '상품'의 일부이고, 그런 '신체' 상품들은 이미 넘쳐 흐른다. 성형수술이 불법인가? 의학적인 목적 아닌 '미학적 목적'의 성형수술은 '신체'상품들을 정교하게 가꾸기 위한 일종의 도구적 지식에 불과하다. 거기에 무슨 철학이 있고, 무슨 인격 고양이 있고, 자아실현이 있나. 거기엔 자본주의적 경쟁 메카니즘의 교묘한 주입이 있고, 거기에서 이기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현이 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걸 옹호하자는 건 물론 아니고, 포르노만 과도하게 비난받아선 곤란하다는 거다. 최소한 같은 건 같게 취급하자. 포르노가 불법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되는 모든 신체들은 불법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열광'의 대상이 되고, 한편에서는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된다. 그건 좀 정말 이상하지 않나?


몸은 물론 인간 인격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몸은 가장 우선, 그리고 최후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헌법상 권리이고, 그 신체는 억압당하거나, 훼손 당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포르노는 신체를 훼손하고, 억압하는가? 내가 보기엔 아니다. 물론 포르노를 가장한 신체 학대와 억압적 상황에서의 강요는 그게 당연히 불법이고, 범죄이고, 처벌 대상이긴 하지만(이를테면 '몰카' 같은거) 자발적인 (배우들과 제작자들의) 포르노(특히 영상물)를 나는 말하고 있다.



2. 포르노를 옹호함

ㄱ. 포르노를 억압하는 사회, 그 사회가 억압하는 몸

포르노에 대한 일방적이고, 과도하게 억압적인 의식화는 몸에 대한 주인의식을 점차로 희미하게 만든다. 자기 몸에 대한 주인은 자기인데, 그 몸이 마치 타자인 것처럼 낯설다. 그 욕망은 쉽게 부정되고, 그 욕망은 쉽게 죄의식과 만난다. 그 낯설게 하기, 죄의식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기존의 표피화된 도덕률과 그 기만적인 의식에 '순응화된 인간'이다. 그건 좀 거칠게 말하면 정치적으로 '순응화된 인간'이다. 포르노에 대한 억압이 갖는 정치적인 함의는 이것이지 않을까? -_-;;


ㄴ. 이율배반
가장 보수적인 권력들, 반동적인 권력들, 파괴적인 권력들은 흔히 대외적으론 금욕적인 '순결주의'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 권력 안에서 벌어지는 건 그런데 철저하게 자기욕망에 충실한 '탐욕주의'다. 그 철저한 이율배반. 그건 새마을 운동 하는 박정희도, 정의사회 구현한다는 전두환도 쌤쌤이다.

386세대의 좌절 역시 금욕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상명하복의 운동 문화가 그 한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386의 위대한 싸움은 상대편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하고, 전면적인 저항이었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문화는 그 극복의 대상과 닮아 있다. 그들은 이제 낮에는 경건한 중견 간부 사원으로, 교수로, 선생님으로, 진보적인 의식의 관성으로 멋지게 이야기하지만, 밤이 되면 룸살롱으로 간다.


ㄷ. 해방을 위한 전제조건
포르노에 대한 너그러운 감수성이 자유와 이성과 계몽적인 해방과 직결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포르노에 대한 주입된, 순응화된 억압적 의식, 거부감이야 말로 자유와 이성과 계몽적 해방과 친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나로선 포르노에 대한 암묵적인 억압, 죄의식, 불쾌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유혹들에 대한 모순된 의식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의식적인 모순, 그 구조화된 이율배반의 한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 )



*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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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화해 - [하얀거탑] 최종회 단상

2007. 3. 12. 00:42  |   리뷰  |   키노씨



0. 장준혁이 죽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성취와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권력의 역학들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났다. 그걸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는 용서받긴 했지만...


1. 미워할 수 없는 인간, 장준혁

장준혁은 선을 상징하지도, 그렇다고 악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그는 매우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왔으며, 오히려 그가 '전형적인 악'을 행할 때에도 그 행위의 동기들은 현실적인 지지, 혹은 이해를 받곤 했다.

(개인적으로 친교하는, 영상콘텐츠에 대한 리뷰를 주로 쓰는 블로거) 박형준은 이런 일반의 지지, 혹은 심정적 동조를 장준혁의 태생적 조건과 장준혁의 짝패로 등장한 '소위' 양심적인 사람들의 '무능'과 '무기력'에서 찾기도 한다. 나는 이런 박형준의 해석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내심 그 해석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이 지점은 이 드라마를 정치 드라마로 해석할 때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 해석의 귀결이 모두 같지는 않을 것이며, 장준혁에 투사되는 인물이 반드시 이**은 아닐 수도 있다). 


2. 거듭 강조하지만 '거탑'은 메디컬 드라마라기 보다는 정치 드라마다.

그 정치드라마로서는 정말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남겼다. 그 드라마 속 인물들이 갖는 상징성은 쉽게 우리나라 현실 정치 지형에 '그대로 대입' 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에게는 소위 따분한 '진보논쟁'보다는 '거탑'을 보고 나서 그 '거탑'의 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철학과 정서를 투사하는 것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정치적 '대화'가 될 수 있을테다.

정치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드라마가 갖는 영향력은 심각하게 고민될 만한다. 그건 그 드라마라는 '상품'이 갖는 대중성과 파괴력 때문에 그렇다. 어떤 드라마 한편을 통해 우리는 그 드라마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를 '추론'하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다.

즉, 모든 문화는 그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 당대의 공기를 흡수하고, 전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레이건 시대의 아이콘이 람보(정확히는 람보 2)인 것처럼 '거탑'은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와 시대정신, 사람들의 욕망과 도덕을 해석하고, 반영하고, 또 전망하면서, 그 자체로 '거탑'의 시청자들에게 도전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질문은 때로는 진부한 드라마의 관습에 갇히고, 때론 너무도 선명한 대립선들로 인해 그 질문의 두께가 현실적 잠재력을 잃기도 한다.

이제 그 아쉬움에 대해 좀더 적어야겠다.


3. 가짜 화해

최종회는 공중파 드라마라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그 최종회를 '가짜 화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물론 이 드라마의 미덕들을 모두 인정하는 전제로, 그리고 연출진과 스텝, 그리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말이다.

'거탑' 최종회는 감상적인 화해, 휴머니티로의 회귀라는 모호한 노선을 취함으로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의 수위를 스스로 낮춰버리고 말았다. 이제 모든 것이 한 인간의 죽음으로 화해를 이루는 것 처럼 보인다. 그 죽음은 모든 갈등을 봉합하는 '마술'을 부린다. 하지만 그 죽음 이후에도 권력은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작동할 것이며, 그 권력을 쫓기 위한 인간의 욕망도 정지하지 않을 것이다.

장준혁은 죽음으로써 너무 쉽게 용서받았고, 그 용서는 매우 감동적이고, 또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준혁의 죽음을 슬퍼하며, 또 거기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현실은 무섭도록 냉정한 곳이며, 그 감상적인 눈물이 우리를 그 냉정한 현실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것이 과도한 수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장준혁은 용서받음으로써, 구원받지는 못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건 정말 깊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나는 상투적인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최도영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드라마가 악의적인 의식적 지향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거탑'은 좀더 더 밀고 나아갈 수 있었지만, 스스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건 정말 깊은 아쉬움이다.


p.s.
그렇더라도, 이런 정도의 수준 높은 정치 드라마를 만들어준 제작진 이하 스텝, 그리고 정말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김명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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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혁처럼 되고 싶어요 - [하얀거탑] 단상

2007. 3. 11. 00:51  |   리뷰  |   키노씨

[하얀거탑]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메디컬 드라마가 아니라, 정치 드라마다.
'거탑'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관점을 유포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투사하는 시청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래, 가진 놈이 장땡이야'.
'그래, 폼나게 사는게 장땡이야'

그런데, 난 그걸 비난할 수 없다.

권력과 성취와 탐닉적이고 매혹적이며 표피적인 이미지들을 우리는 사랑하니까.
물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는 이 천박하게 사랑스런 자본주의의 욕망들에 우리는 이미 '포위'되었으니까.

그걸 그저 이슬똥 먹고, 구름 똥 싸는 산신령이라도 되는 듯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흔히 '잘난 척'의 혐의가 덮어씌어질 수 있는거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계몽'은 피부에 감촉되기 쉽지 않다. 거기에 어떤 깊이가, 그리고 어떤 매혹적인 일탈이, 거부가 없다면.

그리고 실상, 드라마의 이미지들은
장준혁의 성공과 성취의 드라마가 갖는 비도덕, 비윤리성, 철학 부재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냐면, 장준형의 상대방, 혹은 장준혁의 '짝패'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약하기 짝이 없고, 또 순진한 인정에만 호소하고, 철없는 부잣집 딸래미의 투정 같은 이미지로 특징되기 때문이다. 보면서 좀 답답하기까지 하다. 물론 제작진의 의도는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권력은 권력으로 부정될 수 밖에 없다.
그게 슬프지만, 진실이다.

물론 중요한 건 그 권력의 풍경, 그 색깔와 방향이겠지만..
그런데 이제 권력 그 자체를 사람들은 탐닉한다.
혹은 그렇게 학습당한다.
혹은 이미 세상이 그렇다.

나는 예외야, 이런 사람 있다면, 그는 참 뻔뻔하거나, 가식적인 속물이거나, 갈등하지 않는 인간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 확률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예외가 아니다.
다만 난 장준혁처럼 되고 싶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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